상이 이르기를 정양문(正陽門)은 우리나라의 남대문만한가 작은 나라의 성이 이렇게 크다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상이 이르기를,
"정양문(正陽門)은 우리나라의 남대문만한가?"
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작은 나라의 성이 이렇게 크다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선조실록 82권, 선조 29년 11월 26일 무오 1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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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戊午/巳時, 上御別殿, 引見領敦寧李山海、領議政柳成龍、判府事尹斗壽、左議政金應南、知事鄭琢、慶林君 金命元、戶曹判書金睟、兵曹判書李德馨、右參贊申磼、僉知柳永慶、右承旨奇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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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돈녕 이산해·영의정 유성룡 등과 군량·무기·수성책 등에 대해 의논하다
사시(巳時)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영돈녕(領敦寧) 이산해(李山海), 영의정(領議政) 유성룡(柳成龍), 판부사(判府事) 윤두수(尹斗壽), 좌의정(左議政) 김응남(金應南), 지사(知事) 정탁(鄭琢),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수(金晬),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덕형(李德馨), 우참찬(右參贊) 신잡(申磼), 첨지(僉知) 유영경(柳永慶)을 인견(引見)하였는데, 우승지(右承旨) 기자헌(奇自獻), 주서(注書) 조즙(趙濈), 사변 가주서(事變假注書) 최동식(崔東式), 검열(檢閱) 강주(姜籀)·심액(沈詻)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말할 만한 일이 있거든 각각 생각한 것을 아뢰라."
하니, 신잡이 아뢰기를,
"사세가 위급하니, 감히 억견(臆見)을 아뢰겠습니다. 근래 조정에 있는 신하가 다들 성을 지키고 친정(親征)할 것을 말하는데, 말은 다 매우 곧으나 형세로 보면 매우 어려우니 형세가 어려울 경우 막다른 상황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영남(嶺南)이 적을 당하지 못하면 호서(湖西)가 당해야 하겠으나, 호서가 당하지 못할 경우 경성(京城)도 버티기 어려울 것입니다. 경성이 버티기 어려우면 어쩔 수 없이 해서(海西)가 관방(關防)이 되어야 하는데, 해주(海州)·평양(平壤)·영변(寧邊)·강릉(江陵)에는 저축한 것이 아주 없고, 의주(義州)는 대처(大處)인데도 두어 달의 양식마저 얻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 임진년에는 그래도 근근히 대가(大駕)가 머무를 수 있었으나 이제는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대처에서 인심을 보합(保合)하고 미곡(米穀)을 거두어 저축함으로써 뒷날 대가가 머무를 계책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신이 아뢰려는 뜻인데 오늘은 대신이 다 들어왔으니, 의논하여 할 수 있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뜻은 어떠한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신잡이 비변사(備邊司)에서 자주 이 일을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거행하는 것이 옳겠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소신도 자주 이 뜻을 아뢰려 하였으나, 병든 지 오래되어 기력이 간신히 버티므로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전일 큰 군사가 나왔을 때에 처음에는 사흘 동안 개성(開城)에 머무를 것이라고 말하더니 마침내 넉달 동안 군사를 머물렸는데 그때에는 양호(兩湖)에서 양식을 배로 잇따라 날라와서 겨우겨우 대었어도 이 제독(李提督)은 신이 미리 조치하지 못하였다고 군령(軍令)을 시행하려 하다가 그만두었거니와 이제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소신이 체찰사(體察使)이었을 때에 보니, 평양(平壤)에는 6백 석이 있고 용강(龍岡)에는 2천 석이 있으며 그 밖의 여러 고을도 이와 비슷하여 여유가 없었으며 쌀로 바꾸거나 곡식을 모으는 것이 아주 적어 보탬이 없었는데, 임진년에는 평양에 6만 석이 있었습니다.
또 황해도 강음(江陰)은 한 도의 요충으로 저탄(猪灘)에 중병(重兵)을 둔쳐 지킨다면 해서(海西)로 쉽게 몰려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전에 장운익(張雲翼)이 군사를 보내어 와서 말하기를 ‘이 땅은 형세상 지키지 않을 수 없는데, 둔쳐 지키는 곳이 있다면 강화(江華)에 도달할 수 있고 연안(延安)·배천(白川)이 다 내지(內地)가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위로는 권율(權慄)이 군사를 둔친 파주 산성(坡州山城)이 가장 좋은데, 임진(臨津)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파주가 있으니, 이것으로 서로 형세를 만들면 적이 마음대로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경기는 쇄마(刷馬)의 일로 백성이 감당하지 못하니, 매우 답답합니다. 전면(前面)의 방수(防守)가 가장 중요하니, 조령(鳥嶺)·죽령(竹嶺)은 문호(門戶)와 같고 한수(漢水)가 가장 중요한데도 조치하지 못하였습니다. 적이 한두 해 동안 움직이지 않는다면 민심을 수습하여 수어(守禦)할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모든 일은 거행할 만하면 거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두어야 하지 의논만 하고 말아서는 안 된다."
하니, 신잡이 아뢰기를,
"거행할 만한 일은 예단(睿斷)하여 재결하셔야 합니다. 성패(成敗)와 이둔(利鈍)이야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거행할 만한지 거행할 만하지 않은지를 내가 어찌 알겠는가. 대신이 뭇 의논을 모아서 하도록 하라. 영남(嶺南)으로 말하면 어느 곳은 어느 군사가 막고 어느 군사는 어느 장수가 거느릴 것인지 규모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이것도 염려해야 한다."
하니, 신잡이 아뢰기를,
"위에서 치부(置簿)한 한 건(件)의 책을 늘 어람(御覽)하셔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라도와 충청도의 조방장(助防將)은 차출하지 않았는가? 전에는 방어사(防禦使)가 있었다. 큰 적이 오면 한 병사(兵使)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체찰사는 방어사가 병사에 방애된다고 합니다. 전라도의 조방장은 정응성(鄭應星)·김경로(金敬老)이고 충청도는 이방좌(李邦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사가 있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늘 군사를 모을 때면 양떼를 몰듯이 마을 백성을 몰아내었으므로 적을 보기만 해도 먼저 무너졌으나, 이제는 이시발(李時發)이 군사를 훈련한 것이 좌우 6천여 명에 선봉군(選鋒軍)이 1백여 명인데다 정병(精兵)이라고 합니다. 전에 박명현(朴名賢)이 선봉군을 얻어서 한 쪽의 일을 맡고자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봉군은 누가 거느리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제 병사(兵使)가 되었으므로 김시약(金時若)의 군사를 이봉(李逢)에게 주었습니다. 임진년에는 적왜(賊倭)가 한 부대는 대구(大丘)·인동(仁同)·상주(尙州)를 거치고, 한 부대는 경주(慶州)·신령(新寧)·군위(軍威)·용궁(龍宮)을 거치고, 한 부대는 성주(星州)·금산(金山)을 거쳐서 죽산(竹山)에 들어오는 세 길을 취했었습니다. 이제는 조정에서 분부하여 이시발(李時發)이 조령(鳥嶺)에서 막고 이시언(李時言)이 청주(淸州)에서 막되 적이 행여 호남(湖南)으로 들어오면 공주(公州)에서 막도록 했습니다. 조종(祖宗) 때에는 진관(鎭管)을 네 곳으로 나누고, 홍주(洪州)는 해적(海賊)을 막고 공주는 호적(湖賊)을 막도록 했는데 유근(柳根)이 충청(忠淸)에 영(營)을 설치한다 하니, 그 뜻이 좋습니다. 또 소신은 경상(慶尙) 사람인데 경상의 산성(山城) 중에는 부산(富山)만한 데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느 지역에 있는 성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영천(永川)과 안강(安康) 사이인데, 고언백(高彦伯)이 산성을 만들고자 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기(軍器)와 군량(軍糧)은 있는가? 지키지 못한다면 성을 쌓아서 적에게 주게 될 뿐이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낙동강(洛東江) 상류에 창고를 설치하고 성을 쌓으며 배를 많이 갖추면 방어할 수 있으므로 권율(權慄)이 삼도(三道)의 군사를 모아 진(陣)을 벌인다 하니, 좋기는 좋으나, 군량과 설험(設險) 등의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상(右相)도 어렵게 여기는가? 내 생각으로는 한 달에 끝마칠 수 없을 듯한데 3∼4만 군사의 양식을 어디에서 얻겠는가? 양식이 이어지지 않으면 절로 무너질 것이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작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렵게 여기면 마침내 어찌하겠습니까. 우상의 일은 신이 듣기로는 무명 1백여 동(同)과 내수사(內需司)의 명주·베와 보병(步兵)을 죄다 보내면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압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1백여 동의 무명으로도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1백여 동으로 양식을 장만한다면 그래도 할 수 있겠으나, 1백여 동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1만의 군사라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양식이 있는 대로 권율의 말을 들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거행할 만한 일인가? 영상(領相)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는 매우 좋은 말인데 아직 조치하지 못하였습니다. 군량이 있더라도 반드시 저장하여 둘 곳이 있어야 저축할 수 있는데 이것도 못하니 일을 조치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고, 윤두수가 아뢰기를,
"수륙(水陸)이 합심하면 앞뒤로 적을 받을 것이니,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고, 김응남이 아뢰기를,
"내년 4∼5월이면 적이 반드시 움직일 것이니, 두세 곳에 군사를 둔치고 험조(險阻)를 차지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 망하려는 계책이 될 뿐입니다. 양식을 징발하고 군사를 뽑는 것은 수령(守令)이라야 쉽게 할 수 있는데, 합병한 곳이 매우 많습니다. 무변(武弁)을 얻어 20여 명의 군사라도 각각 그 고을의 군사를 뽑아 거느린다면 곳곳에서 적을 막을 수 있을 것인데, 음성(陰城)·화순(和順)·증산(甑山) 같은 데가 그러한 곳입니다."
하였다. 김응남이 아뢰기를,
"충청도의 선봉군(選鋒軍)을 박명현(朴名賢)에게 나누어 주는 일은 체찰사에게 의논하여 해야 하겠으나, 박명현은 효장(驍將)이니, 주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병사(兵使)에게 붙였으니, 다른 사람에게 주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사책(史冊)에서 보건대 예전부터 중간에서 재결하면 일이 이루어지기 어려우니, 그곳에서 사기(事機)를 보아서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체찰사에게 묻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오늘의 일은 대개 먼저 수어(守禦)할 계획부터 해야만 싸울 수 있을 것인데, 싸우고 지킬 때의 양식이 매우 어려우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고, 윤두수가 아뢰기를,
"이번 한강에 얼음이 얼 때에 위에서 친히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열무(閱武)하고 군사를 위로하면,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다들 용동(聳動)할 것이고, 노중(虜中)에서도 소문을 듣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경기의 양주(楊州)·광주(廣州)의 군사가 다들 말하기를 ‘적이 다시 움직인다면 사람이 살 수 없을 것이니, 중국군이 나온다면 각각 쌀을 내어 양식을 돕고자 한다.’ 하니, 누구든 사람을 시켜 타일러서 모으면 쉽게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상류의 파사성(婆裟城)도 수어해야 하겠는데, 양식이 없어서 매우 답답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기(軍器)가 있는가?"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소신이 화살 3백여 부(部)를 보내고 또 전죽(箭竹) 1만여 개를 보냈으며,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전죽 2만여 개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화기(火器)가 있는가?"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화기는 모자랍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식은 어떻게 하는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여주(驪州)·이천(利川)·양주(楊州)·광주(廣州)의 전세(田稅)를 이미 보냈습니다."
하고, 이산해가 아뢰기를,
"의엄(義嚴)이 말하기를 2백 석이라 합니다."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새로 받아들이는 전세도 그 성에 보내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강탄(江灘)은 가장 방수(防守)해야 할 곳입니다. 임진년에도 큰 강이 가로막혀 있으므로 쉽게 건너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이산해가 아뢰기를,
"경기의 독성(禿城)이 가장 좋은데, 양식이 없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미 척간(擲奸)하였다. 성은 매우 좋아도 지킬 수 없다면 말할 것 없다. 이 성을 지킬 수 없다면 산성을 만들 필요가 없다."
하였다. 이산해가 아뢰기를,
"소신의 집이 변양걸(邊良傑)의 집과 가까운데, 양식이 없어서 지킬 수 없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김수에게 이르기를,
"양식이 없다는 말이 맞는가?"
하자, 김수가 아뢰기를,
"전에 6백 석이 있었고 수원(水原)·안산(安山)·광주(廣州)에는 하도(下道)의 양곡을 다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 군사가 많고 적은 것은 알 수 없으나, 어찌 양식이 아주 없다 하겠습니까."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변장(邊將)들은 말이 너무 지나칩니다. 그들을 시켜 들어가 지키게 하므로 이런 말이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독성(禿城)은 비변사(備邊司)가 척간(擲奸)하여, 지키려 하지 않거든 군법(軍法)을 적용하도록 하라."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광주 사람도 스스로 양식을 가지고 들어가 지키려 하고, 수군(水軍)인 사람도 들어가 지키려 하며, 조벌(趙橃)의 둔전(屯田)도 7백여 석이나 되니, 이는 지킬 수 있습니다."
하였다. 신잡이 아뢰기를,
"경성(京城)의 제도는 매우 지키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소신이 어제 동대문부터 성을 돌며 남산의 잠두(蠶頭)까지 보았는데, 조종(祖宗) 때에 산의 형세에 따라서 만들었고 또 격대(隔臺)가 없으므로, 적이 성 밖의 높은 봉우리에 오르면 굽어볼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짐작하겠는데, 북청문(北靑門) 밖은 다 그러하다."
하였다. 신잡이 아뢰기를,
"그 사이에 포루(砲樓)를 만들려 하나 공역(工役)이 가장 많이 들고, 동대문 밖에는 해자(垓子)를 파고 가파른 곳에 석차(石車)를 만들려 하나 재력(財力)이 아주 없으니, 잘 분별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성(都城)을 지키려면 지역을 좁혀 나가면서 쌓지 않을 수 없겠다."
하였다. 신잡이 아뢰기를,
"위에서 늘 군중(軍中)에 계실 때처럼 후면(後面)을 조치하지 않아서는 안 되므로 삼공(三公)이 모인 곳에 서신이 번번이 이 뜻을 진소(陳訴)하여 중신(重臣)이 민심을 보합(保合)하기를 바랐습니다. 적이 다시 침략해오면 온 나라 안이 달아나 피하여 의지해 있을 곳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하고, 김응남이 아뢰기를,
"이 사신(李使臣)을 맞이하여 올 때에 성을 지키는 계책을 의논하려 하였는데, 지역이 너무 광대해서 안 되었습니다. 이제 와서 좁혀 쌓으려 하여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신이 남산에 올라가서 보니, 내어 쌓을 곳이 없습니다. 혹 대로(大路)를 한계로 한다 하는데, 이것은 어렵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대로까지 성을 쌓아서 남쪽을 지킬 것인가, 북쪽을 지킬 것인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남쪽을 지킨다 합니다."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포루를 만들면 지킬 수 있겠습니다마는, 공역할 힘이 없으므로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개 군사는 적고 양식은 없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포루를 만들더라도 기계가 없으면 빈 포루일 뿐이다. 대개 우리 나라의 성은 아주 커서 그 좌우를 쳐도 모르니, 이 제독(李提督)은 평양성(平壤城)을 지키기가 어렵다 하였다. 옛사람은 성을 지키는 일을 번을 나누어서 하였다. 사면이 다 에워싸여 여러 달이 되면 어느 군사로 지킬 수 있겠는가. 또 중국에서는 성을 지키는 것을 매우 긴요하게 여겼는데 여문환(呂文煥)은 양양(襄陽)을 6년 동안이나 지켰다. 우리 나라는 두세 달 동안을 버티기 어려우므로, 장사(將士)가 위태롭게 여겨서 성에 들어가지 않으니, 제도가 이러하고도 몰아 넣을 수 있겠는가. 대개 먼저 마련하여 군사를 나누어 어느 군사는 어느 첩(堞)을 지키고 어느 장수는 어느 면(面)을 거느리게 한 뒤에 자주 순검(巡檢)하고 습진(習陣)해야 하는데, 이제 순검사(巡檢使)를 이미 차출하였으니, 분별하여 하도록 하라."
하자, 신잡이 아뢰기를,
"재력이 결판나서 마련해 낼 곳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습례(習禮)하지 않을 것인가? 사소한 일에도 세 번이나 습례하는데, 성을 지키는 것이 어떠한 일이기에 하지 않는가. 병란을 당하면 필시 어쩔 줄 몰라 할 것이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성을 지키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부득이 화포(火炮), 화약(火藥), 기구(器具)를 다수 마련하고 또 포를 쏘는 군사를 얻고 나서도 양식이 있어야만 이 성을 지키는 일을 의논할 수 있습니다. 대개 포루를 쌓아야 지킬 수 있는데, 중국의 성첩(城堞)은 길기 때문에 용납할 수 있으나, 우리 나라는 높기만 하므로 사람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섭 유격(葉遊擊)이 두 치(雉)를 합하여 한 치를 만들라고 하였는데, 다행히 그렇게만 된다면 만세(萬世)의 계책이 될 것입니다. 조치하지 않고서 지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성은 치첩(雉堞)이 7천여라 한다."
하자, 김수가 아뢰기를,
"9천 9백 36보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도(漢都)가 황성(皇城)보다 크다 한다."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고, 김응남이 아뢰기를,
"서로 비슷합니다."
하고, 유영경이 아뢰기를,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습니다."
하고, 윤두수가 아뢰기를,
"이곳이 더 큽니다. 둘레가 40여 리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양문(正陽門)은 우리나라의 남대문만한가?"
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작은 나라의 성이 이렇게 크다니,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산의 형세가 그러합니다. 대개 신잡이 아뢴 사연은 가장 멀리 생각한 것인데, 외간(外間)에서도 의논합니다. 소신이 체찰사이기는 하나 내려가지 못하고 병도 이러하니, 부사(副使)를 보내어 그곳의 감사(監司)와 함께 의논하여 조치하게 하면 될 것입니다."
하고, 신잡이 아뢰기를,
"외방(外方)의 인심이 흩어졌으니, 부득이 대신이 내려가서 토착 품관(品官)을 모아 사방 이웃 고을을 보합(保合)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 말은 어떠한가? 거행할 만한 것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외간에서도 의논합니다. 전에 이원익(李元翼)을 서방에 내려보낸 것도 이 뜻입니다. 이원익이 내려가면 인심이 반드시 좋아하겠으나 소신의 처사는 이원익에 못 미치고 기력도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종일 열이 올라서 좌우가 다들 괴이하게 여기며, 앞뒤를 잊어서 응수할 수 없습니다. 전에 신잡에게 말하기를 ‘평양에 중국군이 나온다면 영변(寧邊)만으로 조치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더니, 신잡이 말하기를 ‘해주·평양·영변에는 부득이 중신(重臣)이 내려가서 조치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말세(末世)에 파천(播遷)하게 되는 화(禍)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진년에 동궁(東宮)이 영변에 가서 장(醬)도 먹지 못하였으니, 이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신이 청대(請對)한 뜻은 이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醬)은 수토(守土)460) 하는 관원이 할 수 있을 것이다마는, 이 일이 할만한 일이라면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훗날을 염려하는 것인데, 소신은 기력이 버틸 수 없으니, 중임(重任)을 체차하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시켜 경리(經理)케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부득이 대신이 가야 하는가? 중신이라도 될 것이다."
하니, 신잡이 아뢰기를,
"사명(使命)만 다녀오면 일을 조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장을 담그는 것이야 어찌 대신이 할 일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뿐이 아니라 보합(保合)하여 조처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 적과는 한 두해 동안만 서로 버텨야 할 형세가 아니니, 멀리 생각하는 것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소신은 신잡이 가서 조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신은 병 때문에 힘을 펼 수 없습니다. 신잡도 말을 다하지 않았는데, 마치 중국의 남경(南京)·북경(北京)의 예(例)처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뜻은 어떤하가?"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감사(監司)에게 밀유(密諭)하면 조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안 될 것이다."
하니, 신잡이 아뢰기를,
"감사는 무겁지 못합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인심이 흩어지니 먼저 보합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미면(米麪)은 절목(節目)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하고, 신잡이 아뢰기를,
"인심을 두려워해야 하므로 그렇습니다."
하였다. 윤두수가 아뢰기를,
"임진년에는 각 고을이 완전하였으므로 일로(一路)에서 근근히 견디며 지냈으나, 이제는 행여 사변이 있으면 벽제(碧蹄)·동파(東坡)·개성(開城)에서도 먹을 것을 얻지 못하여 넉넉히 대지 못할 듯합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강화(江華)는 조정에서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일은 다 말하기 어려우니 끝내 숨길 수는 없다. 적이 다시 야욕을 부린다면 나는 여기에 있더라도 내전(內殿)은 형세를 보아 내보내려 하는데, 처음에는 해주(海州)에 두는 것이 옳겠다. 조정에서 분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자, 신잡이 아뢰기를,
"위에서는 어느 곳에서든 진을 쳐서 막을 생각을 하시고, 내전은 임시하여 형세를 보아서 행동하는 것이 옳겠습니다마는 조치하지 않으면 머무를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신이 외방(外方)에 있을 때에 신잡과 상의하였는데, 부득이 영변·해주·평양을 행성(行省)처럼 해야 하겠습니다. 전에 홍세공(洪世恭)을 내려보낸 뜻도 이 뜻입니다. 홍세공은 평양 서윤(平壤庶尹) 때에 사람들이 많이 칭찬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홍세공은 무슨 이름으로 내려보냈는가?"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개성과 같은 예로 하였습니다. 또 후면(後面)도 조치해야 하나 하삼도(下三道)도 유념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양호(兩湖)의 형세가 좋은 곳에 조만간 동궁(東宮)이 친정(親征)하거나 왕자(王子)가 내려가서 민심을 위로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하다. 대개 비변사가 의논하여 정하라. 갑작스러우면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김수가 아뢰기를,
"이원익은 담양 산성(潭陽山城)이 좋다고 합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원주를 동경(東京)으로 삼고, 전주를 남경으로 삼고, 개성을 중경으로 삼고, 평양을 서경으로 삼아서 순행(巡幸)에 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원주는 형세가 좋은가? 지키기 어려운 곳이라면 상류일지라도 안 될 것이다."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영원 산성(鴒原山城)이 매우 좋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느 장수가 들어갔는가?"
하니, 이산해가 아뢰기를,
"형용할 수 없이 탕패(蕩敗)되었다 합니다."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지공(支供) 등의 일을 의주(義州)에 계셨을 때처럼 해야만 조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치하려고 하면 아무쪼록 잘 하라."
하였다. 김수가 아뢰기를,
"홍세공이 저 곳에 간 데에는 미의(微意)가 있습니다. 소신은 지권(紙卷)이라도 얻어 둘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신잡이 아뢰기를,
"홍세공이 저 곳에 간 데에는 세 가지 큰 일이 있습니다. 중국군의 양식이 가장 급하고 강변(江邊)의 양식도 잊어서는 안 되며 이 일도 유념해서 해야 할 것인데, 주선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신(重臣)·대신(大臣) 중에서 가게 되면 경리(經理)만 하고 돌아올 것인가, 아니면 그곳에 머무를 것인가?"
하니, 신잡이 아뢰기를,
"소신은 갔다가 돌아와서는 안 되고 유수(留守)의 예처럼 서너 해 머물러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이원익을 서방에 보내려 한다 하니, 아랫사람들이 매우 염려합니다. 대개 남방 백성들은 자기들을 버린다고 생각한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전에는 두 진(陣)이 상대하여도 사신이 그 사이를 다녔다. 김응서(金應瑞)를 시켜 행장(行長)에게 격문(檄文)을 보내어 꾸짖기를 ‘신의(信義)로 서로 교통하였는데 이제 도리어 그것을 저버렸다. 또 너희가 다시 야욕을 부리더라도 우리 나라는 바로 중조(中朝)의 지방이다.’ 하여, 그 뜻을 시험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김응서에게 은(銀)을 많이 주어서 행간(行間)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래서 그 말을 살펴보는 것이 옳겠다."
하니, 신잡이 아뢰기를,
"거느린 여인이 다 우리 나라 사람이라고 합니다. 행장은 책봉하는 일을 극진히 바랐으므로 다시 군사를 일으키는 것을 민망히 여긴다 하니, 은으로 행간하는 것은 여인을 통해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사람은 졸렬해서 매우 행하기 어려우니, 혹 글을 보내어 약조를 저버린 것을 꾸짖어 그 뜻을 살펴보는 것이 옳겠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옛날 회흘(回紇)과 토번(吐蕃)이 화목하지 않을 때가 곽자의(郭子儀)가 둘 사이에서 행간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비변사가 상의해서 하라, 내 생각에는 청정(淸正)과 행장이 자연히 원척(元隻)461) 이 될 것 같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평행장(平行長)은 사사로이 예물(禮物)을 장만하면서까지 책봉하는 일을 이루려 하였으니, 둘 사이가 분명히 좋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본의 재변(災變)이 매우 흉칙하다 하니, 그들도 패하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아마도 스스로 망할 때일 것이다."
하니, 이산해가 아뢰기를,
"산이 무너지고 물이 넘치니, 그 나라가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하늘을 어기고 무리를 움직였으니, 마침내 패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 백성들의 뜻도 기특하여 전에는 달아나 피할 생각을 가졌으나 이제는 스스로 떨치려는 마음이 조금 있습니다. 천도(天道)로 말하면, 흉함이 극도에 이른 사람이 마침내 반드시 멸망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본의 국도(國都)에서 20일정(日程) 내의 군사를 징발한다고 한다."
하니, 김명원이 아뢰기를,
"저희들끼리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 또 별록(別錄)에 ‘대명(大明)이 칠 것인가, 일본이 칠 것인가?’라고 말하였으니, 혹 완롱(翫弄)한 말이라고도 생각되나 중국의 명을 기다리는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사를 쓰는 데에는 비밀을 중요시해야 한다. 임진년에는 저 적이 중국에서 구원하러 올 줄로 생각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중국군의 소식이 이러하니 쉽게 나오지는 않을 듯하다마는 염려스럽다. 그런데 철산도(鐵山島)는 대마도(對馬島) 근처인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20리 떨어져 있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중(城中)에 있는 항복한 왜가 그것을 안다 한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중국 사신은 겨울 이전에 나오지는 못할 것이라 하는데, 이것은 여여문(呂汝文)의 말입니다."
하고, 윤두수가 아뢰기를,
"역풍(逆風)이 잇따라 부니, 나올 기약이 없습니다."
하고, 김명원이 아뢰기를,
"평시에는 세견선(歲遣船)이 1월 10일쯤에 나옵니다. 또 조 신이 어제 호응원(胡應元)을 만났는데, 섭 유격(葉遊擊)이 어제 평양에 왔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섭 유격이 여기에 왔는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추량(芻糧)을 검거(檢擧)한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모진(毛珍)은 오래 머무르는가?"
하니, 김명원이 아뢰기를,
"동봉 찬획(東封贊畫)으로 자칭한다 합니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성을 지키는 일은 근래 바깥의 의논도 같습니다. 경성을 지키려면 장강(長江)이 좋은 형세가 되는데, 이것을 방비하지 않고 성만 지킨다면 적이 성밑에 왔을 때 대응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개 외면을 방어하는 것이 큰 계책이 되는데, 방어하고 성을 쌓는 일을 한꺼번에 아울러 시행하면 무슨 공력(工力)으로 하겠습니까. 전에 습례(習禮)할 것을 명하셨습니다만 성안에 있는 장정은 겨우 3천여 인밖에 안됩니다. 영구히 성을 지키려 할 경우 농사일이 틈날 때에 백성을 부리는 것은 옛사람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저 시행하다가 그만둘 뿐이라면, 급하지 않은 곳은 우선 멈추고 강탄(江灘)을 방어하는 한 가지에만 전력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변사가 의논하라."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의논하는 것은 좋으나, 실속 있는 일이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소신은 병세가 날로 더하고 나라의 일은 이러한데, 게다가 체찰사를 겸하고도 소속을 순심(巡審)하지 못하니, 이제는 결코 견딜 수 없습니다. 겨우 일신을 보전하고 있는데, 오후에는 심열(心熱)이 크게 나서 취한 듯이 어지러워 접때 친제(親祭)에도 헌관(獻官)에 차출되지 못하였습니다. 비변사에는 하루 걸러 왕래하고 훈련 도감(訓鍊都監)도 돌보지 못하니, 이 중임을 맡아서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더구나 어버이를 생각한 지가 오래되어 심려가 일각도 늦추어지지 않습니다. 신의 몸은 돌볼 겨를도 없으나, 나라의 일을 어찌합니까. 4년 동안 병중이어서 지탱할 수 없으니, 부득이 다른 대신을 시켜야 심력(心力)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변변치 못하기는 하나, 짐승의 마음이 아닌데 어찌 나라의 일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기력이 이러하여 일마다 다 그르치게 됩니다. 이러한 때에 계사(啓辭)하기도 정사(呈辭)하기도 다 어려우니, 민망한 생각을 견딜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때에 대신을 어떻게 갈겠는가."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나라의 일 때문에 지극히 민망한데, 조금이라도 견딜 만한 형세라면 신이 어찌 이런 말을 내겠습니까. 체찰사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직접 가서 순검(巡檢)하고 싶어도 병 때문에 갈 수 없으니, 이 직임에서 갈린다면 힘이 미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런 생각을 하지 말고 다시 더 힘쓰라."
하였다. 김수가 아뢰기를,
"비변사가 장속(裝束)하여 대령하라고 하였다 하여 강원도의 군사 40여 명이 이미 서울에 왔다고 합니다."
하고, 유영경이 아뢰기를,
"병조(兵曹)가 분명하게 공문을 보내지 않아서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외방 사람이 이처럼 추운 날씨에 오래 머무를 수 없으니, 빨리 시재(試才)하고 상물(賞物)을 주어 보내라. 아울러 술을 먹이고 궁시(弓矢)도 주라."
하였다. 김수가 아뢰기를,
"양식을 장만할 계책이 없으므로 생각하다 못해 쌀을 받아들이고 녹훈(錄勳)하는 문제에 대해 모여서 사목(事目)을 의논하다가 그만두었는데, 원종 공신(原從功臣)이라면 혹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좋기는 좋으나 쉽사리 할 수 없겠다."
하였다. 김수가 아뢰기를,
"일이 어려우므로 의논이 같지 않아서 그만두었는데, 비변사는 10석 이상을 원종 공신으로 삼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므로 거짓되면 안 되니, 당초에 잘 살펴서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비변사가 살펴서 하도록 하라."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요즈음 듣건대, 노직 추증(老職追贈)을 사람들이 다 바란다 하니, 나이에 따라 석수(石數)를 정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개 전후에 곡식을 받아들인 수와 쓴 수를 아는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서방에 있을 때에는 못하였으나, 그 뒤로는 호조(戶曹)가 치부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주(羅州)의 이복남(李福男)은 장수가 된 자인가? 혹 조방장(助防將)이나 방어사(防禦使)를 겸하여 곳에 따라 적을 토벌하게 하여도 괜찮겠다. 장재(將才)가 있는 자를 나주에 앉혀두는 것은 옳지 않다."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옳은 말씀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주에 산성(山城)이 있으니, 백성을 잘 다스리는 자를 보내면 괜찮을 것이고, 이복남은 장수로 써야 할 것이다. 장재를 얻지 못하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김택룡(金澤龍)이 원수(元帥)의 말을 들으니, 전라도 광양(光陽)·운봉(雲峰)이 한꺼번에 적의 침입을 받으면 병사(兵使) 한 사람이 책응(策應)하기 어려우므로 병사 둘을 두기를 바란다고 하더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사가 둘이 아니더라도 방어사로 될 것이다."
하자, 김수가 아뢰기를,
"체찰사는 방어사가 방애가 된다고 합니다."
하였다. 김응남이 아뢰기를,
"이복남이 나주에서 떠나는 것은 어려울 듯합니다. 그 군사를 데리고 나가 싸우는 것이 좋겠습니가."
하고, 유영경이 아뢰기를,
"나주는 판관(判官)이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김수가 아뢰기를,
"적이 호남에 들어올 경우 순천(順天)이 가장 염려되므로 병사(兵使)를 겸한 자를 얻어 수령(守令)으로 삼으려 한다 하는데, 이것은 원수의 별록(別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순천은 누가 지키는가?"
하자, 김수가 아뢰기를,
"배응경(裵應褧)인데 문관(文官)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산성(山城)이 있는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성이 있으나 야성(野城)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지키기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사변 이후로 국가가 호남의 재력(財力)에 많이 힘입었는데, 근래에는 인심이 흩어져 수습할 수 없고 백성들이 노고로 인해 힘도 다하였으므로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주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조(吏曹)가 혹 벼슬을 제수(除授)하여 사인(士人)을 위로하여 기쁘게 하는 것이 괜찮겠습니다."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이원익이 가장 근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의 말이 옳다."
하였다. 김수가 아뢰기를,
"곡식을 바친 자도 거두어 써야 합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논박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평일에는 버려두었다가 성식(聲息)이 있고 나서야 쓰므로, 사람들도 기분이 안나는 것이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러한 때에 숭장(崇奬)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제는 사변이 있더라도 의병(義兵)을 일으킬 사람이 없을 것이라 합니다."
하고, 유영경이 아뢰기를,
"황주(黃州) 사람이 여러 번 와서 진소(陳訴)하기를 ‘임진년에 적을 토벌하는 데에 힘을 다하였으나 아직 상격(賞格)을 입지 못하였다.’ 하였는데, 황주 사람이 과연 힘껏 싸운 것은 중화(中和)와 다름 없으나, 이번에 그들의 진소에 따라 논상(論賞)할 수 없었으므로 아래에서는 난처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할 만한 일이면 하도록 하라. 섭섭하게 하는 것은 온편하지 못하다. 황주 사람이 힘껏 싸운 것은 사람들이 다 아니, 비변사가 의논해서 하라."
하자, 김응남이 아뢰기를,
"특별히 은전(恩典)을 입어야 할 수 있습니다. 으레 비변사가 의논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였다. 김수가 아뢰기를,
"황주 사람을 논상하면, 봉산(鳳山) 사람이 크게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소신이 강찬(姜燦)을 만났더니,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체찰사가 물어서 하라. 그리고 신 판서(申判書)의 계사(啓辭)에 있는 김응서(金應瑞)가 행간(行間)하는 일은 비변사가 각별히 상의하여 시행하고, 그 나머지도 다 의논하라."
하였다. 미시(未時)에 파하여 나왔다.
【태백산사고본】 51책 82권 58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18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 / 군사(軍事) / 교통(交通) / 사법-치안(治安) / 정론(政論) / 건설(建設) / 인사(人事)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금융(金融)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국용(國用)
수토(守土) : 지방을 맡아 다스림.
원척(元隻) : 원고(原告)와 피고(被告).
검색어: 정양문
“치안먼[Qianmen, 前門]
요약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 남쪽 끝에 위치하는 성문. 과거 베이징의 성문 중에서 황제만이 출입할 수 있었던 베이징 내성의 정문이다. 원래 이름은 정양문(正陽門 Zhengyangmen)이다.
중국 베이징의 중심지 텐안먼 광장 남쪽 끝에 위치하는 과거 베이징 내성의 정문이다. 1419년 명(明)의 영락제 때 처음 건축되었으나 화재와 전란으로 인해 여러 번 소실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것은 1914년에 재건축된 것이다. 자금성 남쪽의 텐안먼과 정면으로 마주보던 치안먼은 1977년 마오쩌둥 기년관이 완성되면서 텐안먼 광장에서는 지붕의 누각만이 조금 보인다.과거 베이징 성은 황제의 거주지인 내성과 일반인의 거주지인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모두 20개의 성문이 있었다. 이 중 내성에 설치된 9개의 성문 중에서 외성에서 내성의 중심부로 출입할 수 있는 정문이 바로 치안먼이다. 이 문은 황제가 천단으로 제사 드리러 가기 위해 통과하던 문으로, 과거 명청시대에는 황제의 마차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례행렬이나 장례마차는 출입이 금지되었다. 중국 당국에 의해서 베이징성의 성문은 대부분 파괴되었지만 치안먼은 그 웅장함과 독특한 모양 때문에 과거 베이징의 상징으로서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다. 치안먼의 높이는 42m로 베이징에 있는 문루 중에 가장 높다. 1949년 공산당이 승리한 후 중국인민 해방군 베이징 수비대에 의해서 점령되었고 1980년까지 군대가 주둔하였다.치안먼의 남쪽 정면에는 과거 화살을 쏘는 망루로 이용되었던 전루(箭樓)가 세워져 있다. 원래는 치안먼과 성벽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도로를 직선으로 정비하면서 성벽을 허물어 현재는 망루만이 남아있다. 치안먼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있지만 전루는 개방되지 않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치안먼 [Qianmen, 前門] (두산백과)
남대문은 높이가 20.91m로 전문에 절반 정도 규모이다!
숭례문 복구공정 3D정보구축 산출도면
숭례문 복구공정 3D정보구축 산출도면 | 이미지형 | 간행물 상세 - 이미지형 - 문화재청
www.cha.go.kr
선조는 이르기를,
"정양문(正陽門)은 우리나라의 남대문만한가?"
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작은 나라의 성이 이렇게 크다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라고 답하였다!
이런 코메디가 어디 있는가?
한 나라의 역사 유물이 절반도 안되는 규모로 축소되어 있는 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가?
“한도(漢都)가 황성(皇城)보다 크다 한다”
한도(漢都)는 어디이며
황성(皇城)은 어디인가?
문맥으로 보아 한도(漢都)는 북경(北京)이고
황성(皇城)은 한양(漢陽)인 것으로 보인다!
“작은 나라의 성이 이렇게 크다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명나라는 작은 나라, 조선은 큰 나라 아닌가?
선조 임금님이 직접 했던 말이다!
그리고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습니다."
하고, 윤두수가 아뢰기를,
"이곳이 더 큽니다. 둘레가 40여 리라고 합니다."
문맥을 보아 한양인 황성(皇城)의 둘레가 9천 9백 36보, 약 40리라고 한다!
한양성
사진 출처: https://blog.naver.com/tryxtry/10183233828
자금성
사진 출처: 구글 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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