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三韓의 땅이 합계 3백여 주州인데...
우리 동방(東方)은 요제(堯帝)와 더불어 같이 일어나서
토지(土地)의 넓이가 만리(萬里)나 되고...
삼한(三韓)의 땅이 합계 3백여 주(州)인데,
이것을 정도에 지나치게 증감(增減)시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백성을 가르치는 근본은 또한 〈임금께서〉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날로 덕을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는 여하(如何)에 있을 뿐입니다...
세조실록 7권, 세조 3년 3월 15일 무인 3번째기사
1457년 명 천순(天順)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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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7권, 세조 3년 3월 15일 무인 3번째기사 1457년 명 천순(天順) 1년 판서운관사 양성지가 전적·사직·존호·경연 등의 일에 대해 상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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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서운관사 양성지가 전적·사직·존호·경연 등의 일에
대해 상언하다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양성지(梁誠之)가 상언(上言)하였는데, 상언은 이러하였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는 성덕 대공(盛德大功)으로써 보위(寶位)에
빛나게 앉아서 상제(上帝)에게 교사(郊祀)329) 하고 태조(太祖)를 배향(配享)했으며, 또 선성
(先聖)330) 을 공손히 알현(謁見)하고는 과거(科擧)를 설치하여 선비를 뽑았으니, 개국(開國)
한 이래로 매우 성대한 행사(行事)입니다. 이는 꼭 신자(臣子)가 순수하고 결백한 한 마음으로
지치(至治)를 보좌해야 할 시기입니다. 신(臣)은 용렬한 자질로써 오랫동안 시종(侍從)의
직책에 외람히 있었으므로, 감히 좁은 소견을 가지고 예람(睿覽)에 우러러 모독(冒瀆)하오니,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감(聖鑑)으로 재택(裁擇)하소서.
1. 친히 적전(籍田)을 밭가는 조목입니다. 대개 옛날에 천자(天子)와 제후(諸侯)가 모두 친히
적전(籍田)을 갈면서 삼추(三推)331) ·구추(九推)332) 의 구별이 있었으니, 그것은
자성(粢盛)333) 을 공급하고 백성의 식생활(食生活)을 중시(重視)하여 경홀(輕忽)히 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바로 지금 상제(上帝)에서 교사(郊祀)하여 이미 광고(曠古)의 성전(盛典)
을 거행하였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몸소 백관(百官)들을 거느리고 친히 동교(東郊)에 거둥
하여 적전(籍田)을 밭가는 예(禮)를 행한다면 장차 상제(上帝)께서 굽어 살펴서 마땅히
풍년이 드는 상서(祥瑞)가 있음을 볼 것이며, 사대부(士大夫)와 서인(庶仁)이 우러러 보고서
또한 농사(農事)의 지중(至重)한 것을 알고는 농토(農土)에 즐거이 달려갈 것입니다. 임금의
발이 한 번 움직이면 삼한(三韓)334) 이 기뻐서 몸을 솟구쳐 춤추듯이 할 것이니, 그 일이
간책(簡策)을 빛나게 하여 은택(恩澤)이 생민(生民)에게 미침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하니,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옛날의 성대한 예(禮)를 반드시 다 거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였다.
"1. 사직(社稷)의 배위(配位)에 관한 조목입니다. 신(臣)이 《제사직장(諸司職掌)》을 상고해
보건대,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는 사직(社稷)에 제사지내면서 황고인조(皇考仁祖)를 배향
(配享)하였으며, 조송(趙宋)335) 도 또한 희조(僖祖)를 불천지위(不遷之位)336) 로 삼았던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환조(桓祖)께서 우리 태조(太祖)를 탄생(誕生)하시어 이
백성을 구제하고 큰 왕업(王業)을 터전잡게 했으니, 쌍성(雙城)의 전역(戰役)은 실제로
내응(內應)이 되었습니다. 쌍성(雙城)이 수복(收復)됨으로써 함길도(咸吉道)의 구성(九城)의
지역(地域)이 수복(收復)되었으며, 구성(九城)이 수복됨으로써 정병 건졸(精兵健卒)이 모두
우리의 소용이 되었으니, 그 공덕(功德)의 성대함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원컨대 옛 제도에
의거하여 환조(桓祖)를 국사(國社)337) 에 배향(配享)하도록 하소서. 또 명(明)나라도 태조
(太祖) 때에 있어서 인조(仁祖)로써 배향(配享)을 삼았는데, 태조(太祖) 후에는 혹 태조(太祖)
를 배향(配享)했는지는 또한 알 수가 없으니, 원컨대 중원(中原)에 들어가서 예관(禮官)에게
이를 물어서 배위(配位)를 정하게 하소서."
하니,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위의 조목은 의정부(議政府)에 내리겠다."
하였다.
"1. 존호(尊號)를 더 올리는 조목입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중니(仲尼)338) 가 말하기를,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은 달효(達孝)339) 일 것이다.’ 하였으니, 두 성인(聖人)을 달효
(達孝)라 일컫는 것은 무왕(武王)은 천명(天命)을 받았으며, 주공(周公)은 문왕(文王)·무왕
(武王)의 덕을 성취시켜 명당(明堂)340) 에 종사(宗祀)하여 하늘에 배향(配享)시키고, 또
태왕(太王)과 왕계(王季)를 추존(追尊)하여 왕(王)으로 삼았으므로, 이른바 모두가 달효
(達孝)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殿下)께서 친히 상제(上帝)를 남교(南郊)에 제사지내고
태조(太祖)를 배향(配享)하였으니, 곧 무왕(武王)·주공(周公)의 달효(達孝)와 같습니다. 지금
번잡한 의식을 거행하여 성대히 존호(尊號)를 받았으니,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큰 경사
(慶事)를 감내하지 못합니다. 원컨대 하향(夏享)에 친히 태묘(太廟)에 강신제(降神祭)를
지내고, 조성(祖聖)의 존시(尊諡)를 더 올려서 효도(孝道)의 도리를 넓히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거의 전대(前代) 성인(聖人)의 효도에 진실로 합할 것입니다. 신(臣)이
전조(前朝)341) 를 살펴보건대, 현종(顯宗)은 영명(英明)한 군주인데 역대(歷代)의 존시
(尊諡)를 더 올리고 중외(中外) 산천(山川)의 신기(神祇)에게도 또한 미호(美號)를 가(加)
했으니, 곧 이런 뜻입니다."
하니,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위의 조목은 의정부(議政府)에 내리겠다."
하였다.
"1. 생신(生辰)을 절일(節日)로 일컫는 조목입니다. 신(臣)이 듣건대, 옛날의 제왕(帝王)들이
모두 〈생신(生辰)을〉 절일(節日)로 일컫는 것은 어버이의 은혜를 소중히 여기고 효도로써
세상을 다스림을 선포(宣布)하는 까닭입니다. 동방(東方)에서는 고려(高麗)의 성종(成宗)이
처음으로 생일을 천추절(千秋節)로 삼았는데, 이로부터 후에는 역대(歷代)에서 모두 명칭
(名稱)이 있었으니, 충렬왕(忠烈王) 때에 이르러서는 수원절(壽元節)이라 일컬었습니다.
전대(前代)의 역사를 상고해 본다면, 요(遼)나라와 금(金)나라에서 사개(使价)를 보내어
와서 생신(生辰)을 하례(賀禮)하게 했으니, 매우 성대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본조(本朝)에
이르러서는 다만 탄일(誕日)이라 일컬어 예(禮)가 매우 간략(簡略)했으니, 본시 불가(不可)
하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臣)이 《당사(唐史)》를 살펴보건대, 발해(渤海)의
대조영(大祚榮)은 고구려[前麗]의 옛 장수인데 갑자기 일어났다가 망했으므로 일컬을 만한
것이 없었는데도, 동국(東國)의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의 융성(隆盛)한 것은 다만 발해
(渤海)만 일컬었을 뿐이고 삼한(三韓)은 참여시키지 아니하였으니, 신(臣)은 가만히 이를
부끄럽게 여깁니다. 우리 동방(東方)은 요제(堯帝)와 더불어 같이 일어나서 토지(土地)의
넓이가 만리(萬里)나 되고, 생치(生齒)342) 가 번성(煩盛)하고 군사와 마필(馬匹)이 강성
하고 백관(百官) 제도가 성대한데, 비록 별도로 연호(年號)는 세우지 못하지마는 유독
고구려(高句麗)의 옛 것을 계승하여 절일(節日)을 일컬을 수는 없겠습니까? 원컨대 대신
(大臣)들로 하여금 서로 의논하여 시행하도록 하소서."
我東方與堯幷興, 幅員萬里, 生齒之煩、士馬之强、百官制度之盛, 雖未能別建年號,
獨不可襲麗舊而稱節日乎?
하니,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될 수가 없다."
하였다.
"1. 경연(經筵)에 나아가는 조목입니다. 신(臣)이 듣건대, 고금(古今)의 제왕(帝王)들은 비록
총명이 세상에 으뜸가는 자질이 있더라도 견문(見聞)이 넓은 학문은 반드시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서사(書史)를 강론(講論)하였습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군주(君主)의 한 마음은
온갖 중요한 정사[萬機]를 재제(裁制)하고 있으므로 지극히 번거롭고 또 괴로우니, 하루
동안에도 모름지기 한 번 경서(經書)를 읽어서 성려(聖慮)를 깨끗이 해야만 마음이 욕심이
없고 밝아져서, 온갖 이치가 모두 갖추게 됨에 따라 인물의 현우(賢愚)를 식별(識別)함이
밝아져서 사람들이 이간(離間)할 수가 없게 되며, 일을 처리함이 적당해져서 정사(政事)가
한 일에만 편중(偏重)할 수가 없게 됩니다. 선정(先正)343) 정초(鄭招)는 사송(詞訟)을
판결할 적에는 반드시 경서(經書)를 보았으니, 또한 이런 뜻이었습니다. 원컨대 경연(經筵)을
회복시켜 녹관(祿官)과 겸관(兼官)을 두기를 서연(書延)의 제도와 같이 하여, 날마다 윤번
(輪番)으로 진강(進講)시켜 성학(聖學)을 더욱 부지런하게 한다면, 거의 고문(顧問)에 도움이
있을 것이고 사책(史冊)에 빛냄이 있을 것이며, 제도를 상고하고 전분(典墳)344) 을 지키는
데도 옳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또 경연(經筵)이 이미 폐지되어 갑자기 설치할 수가 없다면,
원컨대 중조(中朝)345) 의 춘방(春坊)으로써 한림(翰林)을 겸무(兼務)시키는 예(例)에 의거
하여 서연관(書筵官)으로써 윤번(輪番)으로 진강(進講)하도록 하소서. 소신(小臣)은
경악(經幄)346) 에 떠나 있어도 그래도 서연(書筵)에는 모실 수 있는데, 또 서연(書筵)에
나오게 되면 점차로 임금의 성덕(盛德)을 친히 의지할 수가 없으니, 견마지성(犬馬之誠)347)
을 견딜 수가 없으므로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서 아룁니다."
하니,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군주(君主)가 온갖 중요한 정사를 보고 난 여가에 경사(經史)에 마음을 두는 것은 진실로
좋은 일이다. 나는 운수(運數)가 평탄하지 못해서 여가가 미치지 못하고, 국가의 일이 많으니
〈이것이〉 한 가지이고, 세종(世宗) 때부터 수찬(修撰)의 일을 위촉받은 것이 많으니
〈이것이〉 두 가지이고, 지금 세자(世子)를 위해서 삼조 내록(三朝內錄)을 찬집(撰集)하고
있으며, 또 실록(實錄)·산서(産書)·육전(六典) 등의 일은 모두 내가 친히 보고 정할 것이니
〈이것이〉 세 가지이고, 또 내가 나이 이미 불혹(不惑)348) 이 되었으니 어찌 반드시 서생
(書生)과 같겠는가? 〈이것이〉 네 가지이고, 또 진법(陣法)을 익히고 무예(武藝)를 연습하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인약(仁弱)에 실수할까 염려가 되니 〈이것이〉 다섯 가지이다."
하였다.
"1. 국가의 서적(書籍)을 간직하는 조목입니다. 대개 서적은 간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전조(前朝)349) 때에는 서적을 산 속에 있는 절에 간직하였는데, 본조(本朝)에 이르러 비로소
3개의 사고(史庫)를 충주(忠州)·성주(星州)·전주(全州) 등 고을에 설치했으니, 생각이 매우
주밀(周密)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臣)이 듣건대, 간직한 것이 반드시 모두가 비서(祕書)가
아니므로, 반드시 비서(祕書)가 모두 간직되지 아니하였으니 매우 옳지 못한 일입니다.
원컨대 3개의 사고(史庫) 안에 긴요하지 않은 잡서(雜書)는 모두 찾아내도록 하고, 선원록
(璿源錄) 및 승정원(承政院)·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
예문관(藝文館)·춘추관(春秋官)의 문서(文書)를 취(取)하여 책 3건(件)을 선택(選擇)하도록
하고, 또 동국(東國)에서 찬술(撰述)한 여러 서책(書冊)과 제자백가(諸子百家)·문집(文集)·
주군(州郡)의 도적(圖籍)도 모두 구하여 사들이고, 또 1건(件)은 《송사(宋史)》·
《원사(元史)》 등의 책과 같이 모두 전하여 베껴 써서 3개의 사고(史庫)에 간직하도록
하소서."
하니,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이는 유사(有司)에게 독려(督勵)하겠다."
하였다.
"1. 풍속을 순후(淳厚)하게 하는 조목입니다. 대개 국가의 풍속은 삼강(三綱)을 유지(維持)
하는 일에 불과할 뿐입니다. 지금은 군신(君臣)·부자(父子)의 인륜(人倫)이 질서가 정연하여
문란하지 않지마는, 그러나 잠정적으로 일에 견주어 논한다면 수령(守令)이란 사람은 백성의
부모(父母)입니다. 전일에 유서(諭書)가 내릴 적에는 본디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 원망을 호소
하고 탐포(貪暴)한 관리를 징벌(懲罰)할 수 있게끔 했는데도, 긴요하지 않는 잡사(雜事)를
진소(陳訴)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되어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없신여겨 고알(告訐)350)
하는 풍습(風習)이 크게 일어나서, 한 사람의 일에 한 동리가 이에 화(化)하게 되고, 한 동리의
일에 한 고을이 이에 화하게 되고, 한 고을의 일에 한 도(道)가 이에 화하게 되어 한 나라에까지
이르게 되니, 이런 풍습(風習)을 커지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풍습은 한번 이루어지면
일조일석(一朝一夕)에 개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비록 자기의 일이라도
원통하고 억울한 지경에 이르지 않은 것은 사헌부(司憲府)에서 소장(訴狀)을 받아서 처리하지
못하게 하고, 그 받아서 처리한 것도 무고(誣告)인 경우에는 반좌(反坐)351) 하도록 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고알(告訐)이 그쳐지고 탐포(貪暴)도 또한 스스로 중지될 것입니다. 또 노비
(奴婢)의 분수는 군신(君臣)과 같으니 사망(死亡)과 환난(患難)을 구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스스로 가법(家法)이 있지마는, 창졸의 변고가 전조(前朝)의 홍건적(紅巾賊)의
시기와 같이 발생된다면 그 해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금후에는 노비(奴婢)로서 본주인이
수재(水災)·화재(火災)·도적·질병(疾病)·사망(死亡)의 환난(患難)을 만난 것을 보고서 능히
부지(扶持)하고 구호(救護)하는 자는 관청에 알려서 노비(奴婢)를 놓아 양인(良人)으로 만들게
하고, 그 주인이 죽어서 3년 동안을 여묘(廬墓)한 자도 또한 그 역(役)을 면제해 주게 하소서.
또 본조(本朝)의 평민(平民)의 여자는 진실로 논할 것도 없지마는, 양가(良家)의 부녀(婦女)가
절개를 지키는 행실은 취(取)할 만합니다. 그러나 어찌 능히 집집마다 다 그렇겠으며, 백년을
하루와 같이 하겠습니까? 원컨대 금후에는 능히 그 남편을 수재(水災)·화재(火災)·도적(盜賊)·
질병(疾病)·사망(死亡)에서 부지(扶持)한 사람과 나이 20세가 되어 과부(寡婦)가 되었으나
10년에 이르도록 절개를 지킨 사람은 그 문려(門閭)를 정표(旌表)하고, 그 집의 정역(丁役)을
영구히 면제해 주소서."
하니,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고알(告訐)하는 풍습(風習)은 내가 바야흐로 마음을 써서 금지시키려고 하는 때이다.
무고(誣告)를 반좌(反坐)시키자는 의논은 매우 좋다. 노비(奴婢)를 놓아 양인(良人)으로
만들자는 설(說)은 의정부(議政府)에 내리도록 하겠다."
하였다.
"1. 의제(儀制)를 정하는 조목입니다. 대개 예절(禮節)은 3천 3백의 다른 것이 있는데, 그
조목은 길례(吉禮)·흉례(凶禮)·군례(軍禮)·빈례(賓禮)·가례(家禮)의 다섯 가지뿐입니다.
길례(吉禮)란 것은 조정(朝廷)의 예절이고, 군례(軍禮)란 것은 병진(兵陣)의 예절이고,
빈례(賓禮)란 것은 교린 사대(交隣事大)의 예절이고, 가례(嘉禮)란 것은 혼인(婚姻)이고,
흉례(凶禮)란 것은 상장(喪葬)입니다. 원컨대 세종조(世宗朝)에서 새로 찬술(撰述)한
의주(儀注)를 가지고 참작하여 이를 고정(考定)하여서, 특별히 일대(一代)의 전례(典禮)를
이루어 조정의 의식과 병진(兵陣)의 법으로 하여금 질서가 정연하여 차례에 있어서 서로
문란하지 않도록 하고, 삼례(三禮)352) 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게 한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예조(禮曹)에 내리겠다."
하였다.
"1. 호적(戶籍)을 밝히는 조목입니다. 대개 《주례(周禮)》에, ‘무릇 백성은 금년에 난 아이로
부터 그 이상은 모두 호적(戶籍)에 기록하고, 3년 만에 대비(大比)353) 하여 왕(王)에게 바치면
왕이 절하고 이를 받아서 천부(天府)354) 에 올려놓았던 것입니다. 지금 본조(本朝)는 호구
(戶口)의 법이 밝지 못하여 강원도(江原道)·황해도(黃海道)·평안도(平安道)에서는 대부분
1정(丁)을 1호(戶)로 삼고, 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 및 함길도(咸吉道)의 육진(六鎭)
에서는 혹은 수십 인(數十人)을 1호(戶)로 삼기도 하는데, 경기(京畿)와 충청도(忠淸道)에서는
그다지 지나친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아니하였습니다. 강원도(江原道)·황해도(黃海道)의
산군(山郡)의 백성들은 유망(流亡) 하여 직업을 잃게 되므로, 1호(戶)로써 전일의 몇 호(戶)의
부역(賦役)을 제공하게 하니 날로 피폐(疲弊)해졌습니다. 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의
연해(沿海)의 고을에는, 세력 있고 교활한 집에서는 밖에는 한 개의 문을 만들어 놓고 안에는
몇 집을 두고서는, 만약 혹시 찾아내려고 하면 배를 타고 바다에 들어가기도 하고, 종이
본주인을 구타하는 자까지 있기도 합니다. 평상시에는 부자(富者)는 부역을 면하고 빈자
(貧者)는 항상 그 노고(勞苦)를 대신하고 있으며, 전쟁이 일어나면 본디부터 호적(戶籍)에
기재되지 아니하였으므로 반드시 모두 도망하여 숨어 버릴 것이니, 모두가 옳지 못합니다.
원컨대 금후에는 경도(京都)인 한성부(漢城府)와 외방(外方)인 팔도(八道)에 호구(戶口)의
법을 거듭 밝혀서, 존비(尊卑)와 노소(老少)와 남녀(男女)를 논할 것 없이 모두 호구(戶口)를
두어, 없는 사람을 과죄(科罪)하게 하고, 그 사족(士族)들이 거느리고 있는 노비(奴婢)와
평민(平民)이 그 부모(父母)와 한 집에서 같이 사는 사람 외에는 매 3정(丁)을 1호(戶)로 삼고,
3년 만에 한 번 이를 조사하여 1정(丁)을 누락(漏落)시킨 자는 오가(五家) 및 감고(監考)·관령
(管領)을 모두 북쪽 변방으로 귀양 보내고, 1가(家)를 누락시킨 사람은 수령(守令) 및
병방(兵房)의 이속(吏屬)을 모두 죄주고, 이내 다른 사람에게 진고(陳告)하도록 하여, 범인
(犯人)의 전지(田地)와 재산을 가지고 상(賞)에 충당하게 하소서. 또 입사(入仕)한 사람과
소원(訴冤)한 사람도 모두 호구(戶口)를 먼저 조사하도록 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한
사람이라도 국민(國民)이면서 호적(戶籍)에 누락되는 일이 없을 것이며, 한 병졸이라도
단정(單丁)이면서 부역에 나가는 일이 없을 것이므로, 양인(良人)이 다 나옴으로써
군액(軍額)355) 이 넉넉하게 되고, 포도(逋逃)356) 가 나옴으로써 도적이 그치게 되고,
공천(公薦)이 나옴으로써 관부(官府)가 넉넉하게 되고, 사천(私賤)이 나옴으로써 사대부
(士大夫)가 넉넉하게 되고, 시정(市井)의 무리들까지도 모두 호적(戶籍)에 기록하여
석척군(石擲軍)357) 으로 삼아서 전진(戰陣)의 일을 연습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병조(兵曹)에 내리겠다."
하였다.
"1. 의창(義倉)358) 을 실(實)하게 하는 조목입니다. 대개 국가의 미곡(米穀) 수용(需用)은
공상(供上)과 녹봉(祿俸)과 군자(軍資)와 의창(義倉)입니다. 근년에 의창(義倉)에서 대부
(貸付)한 것을 세 차례나 견감(蠲減)해 주었으므로 이로부터 백성들이 의창(義倉)의 곡식을
받고는 예전부터 내려온 관례(慣例)를 희망하면서 환납(還納)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져서 날로
더욱 모손(耗損)되어 가니, 진실로 한심(寒心)할만한 일입니다. 신(臣)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어리석은 백성이 곡식을 얻으면 존절히 하여 조석(朝夕)에 공급하고, 저축(儲畜)하여 흉황
(凶荒)에 대비(對備)할 줄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선왕(先王)이 비로소 의창(義倉)을
마련했으니, 의창은 곧 백성들의 부고(府庫)입니다. 연사(年事)가 비록 기년(饑年)에 이르지
않더라도 여름철의 식량과 종자는 오직 의창(義倉)에만 의뢰(依賴)하게 되는데, 지금 듣건대,
경상도(慶尙道) 한 도(道)의 굻주림을 진휼(賑恤)하려고 하여도 곡식이 없다고 하니, 반드시
장차 군자(軍資)를 빌려야 할 형편입니다. 군자(軍資)는 군려(軍旅)에 사용하게 되고, 의창
(義倉)은 흉황(恟荒)에 사용하게 되니, 모두가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의창(義倉)이
다 없어져서 또 군자(軍資)를 가지고 모두 사용한다면, 국가의 축적(蓄積)이 많이 남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신(臣)이 지난 여름에 의창(義倉)을 보첨(補添)할 계책을 우러러 진술하여
유윤(兪允)을 얻게 되어, 즉시 해당 관사[該曹]로 하여금 조치(措置)하도록 하였지만, 그러나
그 후에는 해당 관사(官司)에서 설시(設施)한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며, 근일에
경상도(慶尙道)의 굶주림에 군자(軍資)를 가대(假貸)한다는 의논이 있으니, 이런 까닭으로 감히
이같이 다시 진술하게 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굽어 살펴서 다시 해당 관사(官司)로 하여금
특별히 포치(布置)를 더하게 하소서."
하니,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해당 관사(官司)에 독촉하여 물어보겠다."
하였다.
"1. 쓸데없는 관원[冗官]을 도태(淘汰)시키는 조목입니다. 대개 쓸데없는 관원은 도태(淘汰)
시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법을 만들고 제도를 정할 적에는 마땅히 이익되는 일과
폐해되는 일은 세밀히 연구하여 장차 백년이 되어도 폐해가 없도록 해야만 하니, 한때에 바쁘게
이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속전(續典)》 이후의 조장(條章)을 먼저 취(取)
하여 《신전(新典)》을 찬술(撰述)하고, 《신전(新典)》이 이미 이루어지면 《원전(元典)》·
《속전(續典)》·《등록(謄錄)》·《신전(新典)》 등 4종(種)의 책을 합하여 이를 참고해서
육전(六典)을 만들어 대성(大成)시키고 이내 관제(官制)를 정하게 하는데, 관제(官制)를 정할
때에는 백관(百官)의 직사(職事) 중에서 어느 것은 도태(淘汰)시켜야 되고 어느 것은 도태
시키지 않아야 됨을 참작하여 이를 증감(增減)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신전(新典)》이 이루어짐으로써 근년의 조장(條章)이 거취(去就)가 있을 것이고, 육전(六典)
이 대성(大成)됨으로써 전후(前後)의 법도(法度)가 한 곳으로 귀착(歸着)됨이 있을 것이니,
관제(官制)가 정해짐으로써 백관(百官)의 준수(遵守)할 바가 있게 되고, 쓸데없는 관원들도
또한 도태(淘汰)될 것입니다."
하니,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내가 이미 포치(布置)했는데, 꼭 내 마음에 부합한다."
하였다.
"1. 작은 현(縣)을 병합(倂合)하는 조목입니다. 대개 작은 현(縣)은 모두 합쳐야 되겠습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중원(中原)과 동국(東國)에서 모두 주·부·군·현(州府郡縣)을 뒤섞어 설치
했는데, 큰 것은 작은 것을 통솔하고, 작은 것은 큰 것을 받들고 있어 큰 것과 작은 것이 서로
유지(維持)하는 뜻인 때문입니다. 체제(體制)와 형세(形勢)를 가지고 말한다면 군·현(郡縣)을
모두 작게 할 수는 없으며, 민사(民事)를 가지고, 말한다면 군·현을 모두 크게 할 수가 없으니,
모름지기 간혹 큰 주(州)를 설치하여 그 형세를 웅장하게 하고, 또 작은 읍(邑)을 설치하여
민사(民事)를 편리하게 한 뒤에야 가(可)할 것입니다. 오늘날엔 길가의 쇠잔(衰殘)한 고을은
그 너무 심한 것만 병합(倂合)시킨다면 가하겠습니다. 만약 예(例)대로 작은 현(縣)을 가지고
큰 주(州)에 합치고, 혹은 작은 현(縣)을 가지고 작은 현(縣)에 병합(倂合)하여 큰 주(州)로
삼는다면, 신(臣)은 그것이 옳은 것임을 알 수가 없겠습니다. 옛날 사람이 산천(山川)의 요해
(要害)와 도로(道路)의 원근(遠近)에 인하여 군·현(郡縣)을 벌여 설치했으니, 삼한(三韓)의
땅이 합계 3백여 주(州)인데, 이것을 정도에 지나치게 증감(增減)시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물며 군(郡)이 크면 백성이 많고, 백성이 많으면 사무가 번다(煩多)하므로, 수령(守令)은
부서(簿書) 처리에 시달려서 한 고을의 민사(民事)를 이속(吏屬)에게 맡기게 되니, 이속의
손에 민사(民事)를 맡기게 되면 백성의 폐해를 받는 것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신(臣)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군·현(郡縣)이 지나치게 큰 것은 나누어 별읍(別邑)을 설치
하고, 그 매우 작은 현(縣)은 큰 현(縣)에 병합(倂合)시킨다면 어찌 큰 고을을 물을 수가
없으며, 작은 고을을 예(例)에 따라 큰 고을에 합쳐야만 할 일이 있겠습니까? 지금의
계책으로서는 경성(京城)과 팔도(八道)의 지도(地圖)·지지(地誌)를 먼저 정하고, 지도(地圖)와
호적(戶籍)을 상고할 때는 그 산천(山川)의 요해(要害)와 도로(道路)의 원근(遠近)과 인물
(人物)의 번다(煩多)함과 간략(簡略)함을 살펴서, 혹은 작은 고을을 가지고 큰 고을에 병합
(倂合)시키기도 하고, 큰 고을을 가지고 나누어 두 고을을 만들기도 하면서, 그 너무 심한 것만
제거(除去)할 것이니, 다만 오늘날에 결의(決意)하여 행할 것은 두 가지가 있을 뿐입니다.
지경을 넘어온 땅은 빠짐 없이 개정(改正)하고, 견아상입(犬牙相入)359) 한 것도 또한 대략
살펴서 정해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군·현(郡縣)의 제도도 문란하지 않고, 백성들도
또한 소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신(臣)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백성이 이미 많고 이미 부유(富裕)하면
또 이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했으며, 또 말하기를, ‘식량을 넉넉하게 하고 병졸(兵卒)을 넉넉
하게 하면 백성이 믿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 세 가지는 한 가지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신(臣)이 지금 진술한 것은 호적(戶籍)이 밝아지면 백성이 이미 많아져서 병졸(兵卒)이 넉넉해
지는 것이고, 의창(義倉)이 실(實)하면 백성이 부유(富裕)해져서 식량이 넉넉해지는 것이며,
백성을 가르쳐서 백성이 믿는다면 풍속이 저절로 순후(淳厚)한 데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을 가르치는 근본은 또한 〈임금께서〉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날로 덕을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는 여하(如何)에 있을 뿐입니다."
하니,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위의 조목을 나의 정사에 천천히 살펴보겠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책 7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7책 185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윤리-강상(綱常) / 왕실
-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 왕실-경연(經筵) / 농업-권농(勸農) / 과학-지학(地學) /
신분-천인(賤人) / 신분-상민(常民) / 역사-편사(編史)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재정-진상(進上) / 재정-창고(倉庫)
[註 329] 교사(郊祀) : 임금이 교외(郊外:서울에서 1백 리 밖)에서 하늘과 땅에 지내던 제사.
동지(冬至) 때에는 남쪽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南郊祀], 하지(夏至) 때에는 북쪽
교외에서 땅에 제사 지냈는데[北郊祀], 원구(圓丘)를 쌓기 때문에 원구제(圓丘祭)라고도 함.
교천(郊天).
[註 330] 선성(先聖) : 공자(孔子).
[註 331] 삼추(三推) : 쟁기를 세 번 미는 것.
[註 332] 구추(九推) : 쟁기를 아홉 번 미는 것.
[註 333] 자성(粢盛) : 제사에 쓰는 서직(黍稷).
[註 334] 삼한(三韓) : 조선(朝鮮).
[註 335] 조송(趙宋) : 조광윤(趙光胤)이 세운 송(宋)나라.
[註 336] 불천지위(不遷之位) : 큰 공훈이 있어 영원히 사당(祠堂)에 모시도록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神位).
[註 337] 국사(國社) : 작은 나라에서 세우는 태사(太社).
[註 338] 중니(仲尼) : 공자(孔子)의 자(字).
[註 339] 달효(達孝) : 한결같이 변함없는 효도.
[註 340] 명당(明堂) : 무덤의 혈(穴)앞에 편편한 땅.
[註 341] 전조(前朝) : 고려.
[註 342] 생치(生齒) : 생민(生民).
[註 343] 선정(先正) : 선철(先哲).
[註 344] 전분(典墳) : 삼분오전(三墳五典), 곧 삼황오제(三皇五帝)의 글.
[註 345] 중조(中朝) : 중국 조정(中國朝廷).
[註 346] 경악(經幄) : 경연(經筵).
[註 347] 견마지성(犬馬之誠) : 신하가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
[註 348] 불혹(不惑) : 40세의 별칭(別稱).
[註 349] 전조(前朝) : 고려(高麗).
[註 350] 고알(告訐) : 관리의 비행(非行)을 들추어 관청에 고발함.
[註 351] 반좌(反坐) : 무고(誣告)하여 무죄한 사람을 죄에 빠뜨리는 자에 대하여 피해자가
입은 만큼의 형벌을 주는 제도.
[註 352] 삼례(三禮) : 흉례(凶禮)·빈례(賓禮)·가례(嘉禮).
[註 353] 대비(大比) : 옛날 주(周)나라 때 3년에 한 번씩 민중(民衆)의 많고 적은 것을
조사(調査)하던 것.
[註 354] 천부(天府) : 주(周)나라 때 제기(祭器)·보물(寶物)·관문서(官文書) 등을
수장(守藏)하는 일을 맡아 보던 관청.
[註 355] 군액(軍額) : 군대의 정원.
[註 356] 포도(逋逃) : 죄를 짓고 달아난 사람.
[註 357] 석척군(石擲軍) : 고려 때 설치된 것인데, 조선조 때에 와서 폐지되었다가 태종
(太宗) 때에 이르러 다시 설치되었음. 오월 단오날에 두 패로 나누어 서로 돌을 던져서 무예
(武藝)를 겨루었음. 척석군(擲石軍).
[註 358] 의창(義倉) : 흉년(凶年)에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평년에 백성들로부터
곡류(穀類)의 여분(餘分)을 거두어 들여 보관하던 창고. 춘절기(春節期)에 나누어 주었다가
가을철에 다시 거두어 들였음. 조적(糶糴).
[註 359] 견아상입(犬牙相入) : 고을의 땅이 개의 어금니처럼 다른 고을의 영내(領內)로 들쭉
날쭉 들어간 것을 말함. 토호(土豪)들의 세력 판도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는데, 그 후
행정 구획이 정비될 때마다 수정이 되어 최근에까지 이르렀음. 비지(飛地).
“우리 동방(東方)은 요제(堯帝)와 더불어 같이 일어나서 토지(土地)의 넓이가 만리(萬里)나
되고, 생치(生齒)가 번성(煩盛)하고 군사와 마필(馬匹)이 강성하고 백관(百官) 제도가 성대
한데, 비록 별도로 연호(年號)는 세우지 못하지마는 유독 고구려(高句麗)의 옛 것을 계승하여
절일(節日)을 일컬을 수는 없겠습니까?....”
我東方與堯幷興, 幅員萬里, 生齒之煩、士馬之强、百官制度之盛, 雖未能別建年號,
獨不可襲麗舊而稱節日乎?
글자가 삐뚤어져 있는 것이 있고, 짙은 글자와 옅은 글자가 보이고
인쇄 상태가 조잡하다!
조선의 연호
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9D%98_%EC%97%B0%ED%98%B8
고종 이전의 조선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명과 청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중국 연호에 보조하여 사용한 것으로 '갑자', '을축' 등의 간지(干支)와 '태조 원년',
'정조 15년', '금상(今上) 5년' 등의 재위(在位) 연도가 있다.
서력기원과 조선의 기년법 대응
원칙적으로 새 왕이 즉위한 해는 그대로 전왕의 연호를 사용했고, 즉위한 다음 해를
원년으로 계산하였다.
그러나 시조인 태조나 정변(반정)에 의해 즉위한 세조, 중종, 인조의 경우는 즉위년이 곧
원년이 되었다. 그밖에 1907년 대한제국 순종이 즉위하면서 순종 즉위년을 융희원년
(隆熙元年, 순종원년)으로 삼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 삼아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시켜 정상적인 황위 계승이 되지 못한 사례이다.
“우리 동방(東方)은 요제(堯帝)와 더불어 같이 일어나서 토지(土地)의 넓이가 만리(萬里)나
되고, 생치(生齒)가 번성(煩盛)하고 군사와 마필(馬匹)이 강성하고 백관(百官) 제도가
성대한데!” 왜 독자적인 연호를 쓰지 않았겠는가?
“삼한(三韓)의 땅이 합계 3백여 주(州)인데, 이것을 정도에
지나치게 증감(增減)시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일본은 66주(州)
“선조실록 62권, 선조 28년 4월 19일 辛酉 9번째기사
1595년 명 만력(萬曆) 23년
http://sillok.history.go.kr/id/wna_12804019_009
조선왕조실록
○政院, 以備邊司降倭供招, 啓曰: "臣持酒饌, 與譯官朴大根, 往饋降倭 助四郞、老古汝文等十一名, 而探其事情, 則對曰: ‘俺等, 上年正月, 始渡海, 各隨主將, 或隷薺浦, 屯行長管下將有馬修理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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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이 비변사가 항왜를 공초한 것으로 아뢰다
정원이 비변사가 항왜(降倭)를 공초(供招)한 것으로 아뢰기를,
"신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역관 박대근(朴大根)과 함께 가서 항왜인 조사랑(助四郞)·
노고여문(老古汝文) 등 11명을 공궤(供饋)하고 그 사정을 탐문하니, 대답하기를, ‘우리들은
지난해 1월에 처음 바다를 건너서 각각 주장(主將)을 따라 제포(薺浦)에 주둔하고 있는
행장의 관하(管下) 장수인 유마수리 대부(有馬修理大夫)에게 예속되거나 혹은 평호도 법인
(平戶島法印)에게 예속되었으며, 혹은 동래(東萊)에 주둔한 수하(樹下) 등 장수의 군대에
예속되었었다. 그런데 수자리를 괴롭게 여기던 즈음에 조선이 후히 대접하다는 소식을 듣고
항시 도망하여 오고자 하였으나 실정을 알지 못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였었다. 그러던 중 금년
3월 경에 전라 병영(全羅兵營)의 한 군관(軍官)이 매[鷹]를 가지고 칼과 바꾸기 위하여
행장의 진영에 와서 우리들을 유혹하기를 「너희들이 내 말을 따라 우리 진영에 오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 하였다. 우리들은 그의 말을 믿고서 나왔는데 진중에 도착하던 날
병사(兵使)가 말하기를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 너희들은 상경(上京)한 뒤에 반드시 극히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믿어 의심치 말고 상경하라. 」 하였다. 우리들은 이미 조선에 항복
하였고 죽고 사는 것도 조선에 달려 있으므로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상경한 것으로 특별히
다른 뜻은 없다. 다만 지난번 모산일고(模山日高) 등은 그 음모가 정말 흉악하여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였으니, 이 때문에 우리들은 두려움을 금할 수 없다. 이곳에 머물 수 있으면
머물게 해주고 이곳에 머무를 수 없으면 좋은 곳으로 보내주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이에 위문하기를 ‘너의 말을 듣고 보니 범상한 왜인들이 아니라 가련한 생각이 든다. 너는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아는가? 일본이 군대를 일으킨 전후 사정을 듣고자 한다.’
하니, 조사랑이 머리를 조아리고 대답하기를 ‘지금 관백(關白)은 본래 시골 출신으로 용맹을
과시하고 싸움을 좋아하였는데 관백에 봉해진 이후론 제 마음대로 9주(州)를 정벌하니 9주의
사람들이 모두 따랐고, 또 관동(關東)을 정벌하니 관동 사람들도 모두 바람에 휩쓸리듯
따랐다. 관백이 항시 스스로 자랑하여 말하기를 「공략하면 반드시 취하고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일본 66주가 이미 모두 나에게 돌아왔으니 비록
죽더라도 마음이 상쾌하다. 」 하였다. 그리고 대마도주(對馬島主) 의지(義智)를 불러서
묻기를 「조선은 나라가 부유하고 군대가 강하니, 우리가 명나라와 통호(通好)하는 것을
따르겠는가. 」 하니, 의지가 처음에는 쉽게 대답하였으나 나중에는 조선과 우호를 맺을 수
없다 하여 관백에게 말하기를 「명나라와 통호하려면 먼저 조선을 공략해야 명나라와 통하는
길을 얻을 수 있다. 」 하였다. 이 때문에 관백은 의지와 소서행장(小西行長)·
가등청정(加藤淸正)·흑전장정(黑田長正) 등을 선봉장으로 정하여 내보냈는데, 조선이 싸울
능력이 없어서 명나라에 군대를 요청하였고, 명나라도 강화를 말하여 서로 강화를 맺기로
약속한 것이다. 그 후에 오래도록 서로 버티면서 관백이 회군(回軍)하려고 하지 않아,
제장(諸將)들이 회군하기를 고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선 인질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인질이 재신(宰臣)이나 금중(禁中) 사람이 아니면 철병하지 않겠다는
말을 우리들이 자세히 들었다. 만약 이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철병하고 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관백에게 달려 있으니 어찌 될는지 헤아릴 수 없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행장은 이 일은
말하지 아니하고 준봉(准封)이니 준공(准貢)이니 라고만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슨 생각에서
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관백의 속셈은 토지를 탐내는 것이 아니라 명나라 및 조선과 통호
(通好)하여 만세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행장 등은 통호를 말하여 관백의 뜻을
받들고 힘써 강화를 도모하면서 이곳에서 여러 해를 머물고 있는 것이며, 청정과 제장들은 이
때문에 서로 사사로이 미워하는 것이다. 만약 행장이 통호하지 못하면 우선 관백의 주륙을
면하기 어려우므로 항상 온순한 말로 심 유격을 꾀이고 있는 것인데, 명나라가 어찌 이 사람의
음흉하고 패악한 정상을 알겠는가. 청정의 말은 관백의 마음에 통할 수 있고 제장들은 모두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으니, 화사(華使)가 도착하는 날 행장이 제장들과 함께 관백에게 잘
보고하면 철병할 이치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도 억측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일본은 물력(物力)이 옛날과 변함이 없고 백성중엔 원망하고 억울해 하는 사람이
없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일본 풍속은 농부는 밭을 갈고 무사는 용기를 기르며 군대는
관의 곡식을 먹으니, 군대를 일으킨 지 오래 되었어도 물력은 옛날과 다른 것이 없다. 그러나
백성은 군량을 운반하기에 바쁘고 요역(徭役)이 몹시 심하여 모두가 원망하고 괴로워하는데
위엄에 눌려 감히 말을 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순조실록 12권, 순조 9년 12월 2일 丁亥 2번째기사
1809년 청 가경(嘉慶) 14년
http://sillok.history.go.kr/id/wwa_10912002_002
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 12권, 순조 9년 12월 2일 丁亥 2번째기사 1809년 청 가경(嘉慶) 14년 도해 역관 현의순 등이 아뢴 대마도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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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해 역관 현의순 등이 아뢴 대마도의 사정
도해 역관(渡海譯官) 현의순(玄義洵)·최석(崔昔) 등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
별단(別單)으로 아뢰기를,
일본국(日本國)에는 팔도(八道)가 있는데, 도(道)에는 66주(州)가 있고 주에는
6백 32군(郡)이 있으며, 군(郡) 이외에는 3도(島)가 있습니다.“
“일본
북위 45도 33분에서 20도 25분 사이에 위치, 4개의 주요 섬으로 구성
377,950km2(한반도 면적의 1.7배)
4계절이 분명하며, 대체로 해양성 온대 기후. 남-북 길이가 3,300km로 지역별 기후 차이가
심함
1억 2,731만 명(총무성 통계국 2013.5.1현재(확정치), 2013.10.21.발표)“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081275&cid=48531&categoryId=48563
① 도쿄 ② 교토 ③ 나라 ④ 히메지 성
⑤ 나가사키 ⑥ 뱃부 지옥 온천 ⑦ 아소산“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60076&cid=47307&categoryId=47307
삼한(三韓) 300주(州)
일본 66주(州) 377,950km2
대략적인 삼한(三韓)의 면적은 일본의 4.5배 정도이다!
300/66(4.5) X 377,950 km2 =171만 km2
“백성을 가르치는 근본은 또한 〈임금께서〉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날로 덕을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는 여하(如何)에 있을 뿐입니다..."
“경연(經筵)
요약: 군주에게 유교의 경서(經書)와 역사를 가르치던 교육제도, 또는 그 자리.
일찍이 한(漢)나라에서 황제에게 유교 경전을 강의하는 관례가 생겼으며, 당(唐)나라에서는
한림원(翰林院)에 이를 전담하는 관직을 두면서 어전강의가 점차 제도화되었다. 특히, 북송
(北宋)에서는 경연관(經筵官)의 직제가 더욱 정비되고 강의교재도 체계화되었으며, 강의
일정도 확립되었다. 그러나 원(元)·명(明)·청(淸)나라 때는 경연이 내용 없는 형식으로
변질되어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한편, 한국에서는 고려 중기에 예종이 이 제도를 도입하였으나, 무신정권 때 폐지되었다.
원나라의 지배 아래서는 서연(書筵)으로 격하되어 명맥을 유지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 제도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경연정치’가 나타났으며, 경연은 가장 중요한 정치협의
기구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德川] 시대에 실권자인 쇼군[將軍]을 대상으로 유교 경서를 강의하는
관례가 있었으며, 메이지[明治]유신 이후에는 천황에게 강의하는 의식이 생겼다. 경연관의
직제는 일단 송대에 정비되었고, 원대 이후에 약간의 변화를 거쳤으며, 조선시대에는 이를
더욱 보완하였다.
경연관은 1품에서 9품에 이르는 관리 약 30명, 즉 3정승(1품)을 포함한 1~2품 대신들과
승정원의 6승지(정3품) 및 홍문관(처음에는 집현전)의 부제학(정3품) 이하 정9품에 이르는
관원 1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강의는 주로 홍문관원이 맡았다.
교재는 4서 5경과 역사 및 성리학 서적을 일정한 순서에 따라 강의하였다. 4서 5경의 경우에는
주석집(註釋集)을 정독하였고, 역사서는 통독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일정은 매일 아침에
조강(朝講)을 실시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포함하여, 세 번
강의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강에는 대신 2~3명, 승지 1명, 홍문관원 2명(이상 경연관), 사헌부와 사간원 각 1명,
사관
사관(史官)이 교대로 참석하였으며, 주강과 석강에는 승지·홍문관원·사관만이 참석하였고,
왕은 매번 참석하였다.
조선시대의 경연은 교육제도일 뿐만 아니라, 정책협의기구로서의 기능도 컸다. 강의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국왕과 신하들이 정치 현안들을 협의하는 것이 관례였다.
특히, 조강에는 국왕을 비롯하여 의정부·육조·승정원·홍문관·사헌부·사간원 등 권력의
핵심부가 한자리에 모였기 때문에 정책을 협의하기에 편리하였다. 본래 조선왕조는 군주와
신하들이 연석회의가 따로 없었으며, 주요 관청 사이의 정책협의기구도 없었다.
따라서 경연은 중요한 정책협의기구로 발전하였으며, 왕의 일상생활 및 정치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시대의 이 특이한 정치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 때 축소되어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연 [經筵] (두산백과)
조선의 임금님은 공부하고, 토의하고, 결정하는 합리적인 시스템 속에서 정책 결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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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 천여 리나 되는 한 도道의 44주州를 (0) | 2022.1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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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문(正陽門)은 우리나라의 남대문만한가 (0) | 2022.10.19 |
기전畿甸 수백 리를 한없는 풀밭으로 만들어 (0) | 2022.10.19 |
그때 세조가 궁병 백만을 길러 오랑캐[夷狄]를 제압하려고 결심하고 (0) | 2022.10.18 |
옛날 고구려는 단지 평안도 등의 도만이 있었을 따름인데 (1) | 2022.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