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三韓은 바닷가의 땅으로서 일찍이 주周나라 때 봉작封爵한 봉토封土를 계승하였습니다
일본 국왕(日本國王) 원의재(源義材)가 중 원국(元匊) 등을 보내어 와서 조빙(朝聘)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삼한(三韓)은 바닷가의 땅으로서 일찍이 주(周)나라 때 봉작(封爵)한 봉토(封土)를 계승하였습니다...
日本國王源義材遣僧元匊等來聘。 其書曰: "奉書朝鮮國王殿下, 三韓海闊, 尙襲周爵之封
성종실록 289권, 성종 25년 4월 10일 무진 1번째기사
1494년 명 홍치(弘治) 7년
http://sillok.history.go.kr/id/kia_12504010_001
조선왕조실록
○戊辰/日本國王源義材遣僧元匊等來聘。 其書曰: "奉書朝鮮國王殿下, 三韓海闊, 尙襲周爵之封, 八月風高, 重馳漢槎之使。 先是, 所須龍宮秘典翠羽珍禽幷方物等, 皆與回書偕到, 欣賀之懷, 不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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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왕 원의재가 보낸 조빙하는 글
일본 국왕(日本國王) 원의재(源義材)가 중 원국(元匊) 등을 보내어 와서 조빙(朝聘)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조선 국왕(朝鮮國王) 전하께 글을 받들어 올립니다. 삼한(三韓)은 바닷가의 땅으로서 일찍이 주(周)나라 때 봉작(封爵)한 봉토(封土)를 계승하였습니다. 8월의 풍파(風波)가 높았으나, 조선에서 보낸 사신이 거듭 이르고, 이보다 앞서 요구한 용궁(龍宮)의 비전(秘典)342) ·취우(翠羽)343) ·진금(珍禽)344) 과 방물(方物) 등이 모두 회서(回書)와 함께 같이 도착하였으므로, 기뻐하고 축하하는 마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성(城) 남쪽에 있는 절은 이름이 묘승사(妙勝寺)인데, 잡초가 뒤덮인 지 여러 해가 되고, 정사(精舍)가 오래도록 폐지되어 앉을 적마다 집이 새고 걸을 적마다 땅이 거칩니다. 폐읍(弊邑)은 어려움이 많아 수선(修繕)하여 완성시킬 겨를이 없기 때문에 전사(專使) 원국 장로(元匊長老)를 보내어 상국(上國)에 가서 뵙고, 정상을 말씀드리게 합니다. 벽옥(壁玉)을 얻고 검(劍)을 구하는 데 한정이 없다는 꾸짖음을 받을까 두려우나, 흉년에 굶주릴 때에 이웃 나라에 구제하도록 비는 것은 곧 《춘추(春秋)》의 일상 예입니다.
송(宋)나라에서 만약 백뢰(百牢)의 인정(仁政)345) 이 있었다면, 진(晉)나라에서 어찌 삼사(三舍)의 보답346) 이 없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마음에 두고 이를 헤아려 주소서. 변변하지 못한 토의(土宜)를 별폭(別幅)에 기록하오니, 채납(採納)하시면 오로지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별폭은 금을 장식한 병풍(屛風)이 2장, 연소(練素) 10필, 장도(長刀) 2자루, 대도(大刀) 2자루, 마노(碼碯) 4덩이, 요자제자(銚子提子) 4구(具), 벼루와 문대(文臺) 아울러 1개, 채화선(綵畫扇) 1백 자루, 갈롱(葛籠) 10개, 홍칠 흑칠의 잡색 목통(雜色木桶) 2개이었다.
【태백산사고본】 46책 289권 5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503면
【분류】외교-왜(倭) / 무역(貿易)
[註 342] 비전(秘典) : 불경(佛經).
[註 343] 취우(翠羽) : 물총새의 깃.
[註 344] 진금(珍禽) : 진귀한 새.
[註 345] 백뢰(百牢)의 인정(仁政) : 《춘추(春秋)》 애공(哀公) 7년조를 보면 송(宋)나라에서 노(魯)나라에 백뢰(百牢)를 바쳤으므로, 노나라에서도 뒤질 수 없다고 하여 답례를 그만큼 보냈다고 함. 백뢰(百牢)는 1백 마리의 소와 양을 말함.
[註 346] 삼사(三舍)의 보답 : 《춘추(春秋)》 희공(僖公) 23년조를 보면, 초(楚)나라 성왕(成王)이 진(晉)나라 공자(公子)를 잘 대접하자, 진 공자가 말하기를, "우리 진나라와 귀하의 초나라가 군사를 거느리고 중원(中原)에서 싸우게 된다면 나는 임금님과 싸움을 피하여 삼사(三舍:1사(舍)는 30리)를 후퇴하겠습니다."라고 하여 그 은혜를 보답하여 싸움을 피하고자 하였음.
삼한(三韓)은 바닷가의 땅으로서 일찍이 주(周)나라 때 봉작(封爵)한 봉토(封土)를 계승하였습니다.
봉작(封爵)
정의
왕자·외척·공신에게 공·후·백·자·남의 작을 봉해주던 제도.
내용
흔히 봉작(封爵)이란 ‘작(爵)을 봉한다’라고 풀어 사용할 수도 있지만, 그 자체 명사로 사용할 수도 있다. 사료에서는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 외에 일반 관직을 작 혹은 관작(官爵)으로 표현하는 수도 있으나, 봉작이라고 할 때는 공·후·백·자·남의 작을 수여하는 것만을 의미한다. 그것은 봉(封)에 특별한 뜻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봉작 외에 ‘○○군(君)’으로 봉해주는 봉군(封君)이 있는데, 넓은 의미에서 봉군도 봉작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지만 사용상의 의미가 다르다. 작의 범위에 공·후·백·자·남 외에 군도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 후기부터 봉작과 봉군이 명확히 구별되면서 그 역사성을 갖게 되었다. 사서에서 단편적으로 봉작·봉군하는 것 외에 봉작제는 고려 문종 때, 봉군제는 고려 충선왕 때에 제도화되었다. 그 대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시대에는 자료가 없어서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고구려의 경우 양국군(讓國君)·안국군(安國君) 등으로 봉해준 예가 보이고, 백제의 경우 비록 5세기에 한정된 것이긴 하나 면중왕(面中王)·도한왕(都漢王)·불사후(弗斯侯)·면중후(面中侯) 등의 봉작의 예가 다수 보인다. 신라의 경우에도 상사서(賞賜署) 내지 사훈감(司勳監)이 있었는데, 이로 보아, 삼국시대에 봉작에 대한 어떤 제도화된 형태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잘 알 수 없다.
봉군제와 봉작제가 기록상으로 명확하게 나타나는 때는 고려시대부터이다. 즉 봉군(封君)은 국초에 종친을 원군(院君)·대군(大君)이라 칭하고, 또 이성제군(異姓諸君)이 처음에 공·후·백·자·남의 5등 봉작제를 썼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고려시대의 봉작제는 현종 이후에 공·후를 봉하였다고만 간단히 보일 뿐, 명확한 연대는 밝혀져 있지 않다.
한편 980년(경종 5) 최지몽(崔知夢)이 처음으로 동래군후(東萊郡侯)로 봉해진 뒤 봉군한 사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5등 봉작제는 실제로 경종 때에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이것이 제도적으로 정비된 것은 문종 때이다. 『고려사(高麗史)』 백관지(百官志)에 의하면, 국공(國公)·군공(郡公)·현후(縣侯)·현백(縣伯)·개국자(開國子)·현남(縣男)의 등급과 그에 따른 식읍과 관품을 정하고 있다. 그 실례를 기록에서 찾아보면, 왕족은 공·후·백의 호를 많이 사용하였고 상서령(尙書令)·중서령(中書令)이나 태위(太尉)·사공(司空)을 병용하였다. 반면 비왕족은 국공·군공·군후·현후·군백·현백·현자·군남·현남 등에 제수되었다.
이후 봉작제는 1298년(충렬왕 24) 1월, 충선왕이 관제를 개혁하여 봉군제로 바꾸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봉군제가 대국(大國)을 의식한 상피제(相避制)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즉, 원(元)의 간섭 아래 충선왕이 봉작제를 봉군제로 개칭하였다가 1356년(공민왕 5) 7월에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쓰면서 관제를 개혁하여 봉작제로 바꾸었고, 1362년(공민왕 11)에 원의 압력으로 또 관제를 개혁할 때 다시 봉군제로 바꾸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는 처음 충선왕이 정한 봉군제를 쓰다가 1398년(태조 7) 9월에 공·후·백의 봉작제로 고쳤다. 이것은 명의 거듭된 무리한 요구로 관계가 악화되어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주장하는 도중에 이루어진 것 같지만 잠깐일 뿐이고, 1401년(태종 1) 1월에 태종이 중국의 명호를 외람되게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다시 봉군제로 변경한 것이다. 봉작제는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될 때 부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봉작 [封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봉토(封土)
①무덤을 만들기 위해 흙을 모아 쌓아 올리는 것.
②천자(天子)가 제후(諸侯)를 봉하고 그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한 땅. [유사어] 봉지(封地). 영지(領地).
한국고전용어사전 : 네이버 지식백과
우산, 권문세족, 근조, 압사, 호상, 희우정, 사단, 버짐, 본관, 육오, 승중상, 팔자, 도승지, 십상시, 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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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의 건국
독특한 지배체제, 봉건제도를 채택하다
요약: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주 왕실은 점차 영토가 확대되면서 주민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는 방법을 고민하게 됐다. 당시의 기술 수준이 낮아 간접통치를 할 수밖에 없는 점을 고려하여 봉건제도를 창안했다. 그리고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봉건제도에 혈연적 특색을 가미한 종법제도도 만들었다.
- 중략 -
주나라, 상나라를 멸하고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 되다
상나라의 제후국에 불과하던 서쪽의 주(周)족이 눈부시게 성장하여 마침내 상을 멸하고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최근 주나라의 청동기 문화가 강소, 안휘, 호북 등 양자강 유역에서도 발견된 것으로 볼 때, 상의 지배기에 황하 중하류 지역에 그치던 중국의 영향력이 주나라에 이르러 양자강까지 확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나라 때에 중국 중심의 천하관과 화이(華夷)의 관념이 생겨나고, 천명사상이나 혈연 중심의 예문화가 자리 잡는 등 중국문화의 뼈대가 마련되었다.
서주 영역기원전 1046~770년 존재했던 서주. 서쪽의 호경이 도읍지였다.
주(周)나라는 서주(기원전 1046~770년)와 동주(기원전 770~256년)로 구분된다. 이는 견융의 침입으로 수도를 호경(鎬京, 현재의 서안 부근)에서 동쪽의 낙읍(洛邑, 현재의 낙양)으로 옮긴 것을 기점으로 나눈 것이다. 즉, 도읍이 서쪽의 호경에 있었던 시기가 서주 시대, 동쪽의 낙읍에 있었던 시기가 동주 시대이다.
비옥한 관중평원에서 농업의 기틀을 닦다
전설에 의하면, 주족의 시조는 후직이다. 그의 어머니 강원은 들에서 바위에 새겨진 신의 발자국을 밟은 후 이상한 기운을 느껴 그를 잉태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삼과 콩을 재배하기를 좋아했는데, 놀랄 만큼 결실이 좋아서 사람들은 그로부터 농사의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농업생산력이 풍부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이야기다.
주족은 지금의 섬서성 서안 부근, 비옥한 관중평원에서 농업의 기틀을 닦으면서 성장했다. 이곳은 농경에 적당할 뿐 아니라 천연의 요새이며, 또한 감숙 방면으로부터 서방문화가 중국으로 들어오는 관문이다. 전국을 통일한 진도 이곳에서 성장했다. 후직의 10대손인 고공단보 때에 기산 아래 주원(周原)에 정착했다고 하는데, 주의 명칭도 이로부터 유래한다. 이곳은 예로부터 주의 청동기가 많이 나기로 유명한 곳인데, 3개의 담장과 뜰로 이루어진 왕궁 유적도 발굴되었다.
은 · 서주 시대의 갑조궁실 터섬서성 치산현 봉추촌에 있다. 서상실 남쪽 두 번째 방의 고실에서 갑골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방은 종묘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의 무왕, 상의 대군을 격파하다
고공단보의 아들 계력 때 주의 국력은 크게 성장하여 상의 경계를 사기에 이르렀다. 계력은 상 왕실에 의해 살해되었지만, 그의 아들 문왕 때에 이르러 유명한 태공망 여상의 보필 속에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였다. 상나라는 서백의 칭호를 주고 이를 회유하려 하였다. 그러나 문왕은 이미 상나라 정벌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고, 그의 아들 무왕에 이르러 이 계획은 실행되었다.
서주 청동기상나라에 비해 예술성이 간소화된 서주의 청동기 유물.
마침 상의 주왕이 동방의 대정벌에 나섰다. 기회를 포착한 무왕은 '목야의 결전'에서 상의 대군을 격파했다. 전쟁에서 패한 주왕은 궁전을 불사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흔히 주왕은 아름다운 달기와의 사랑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했다고 전해지는데, 상의 계속된 무력정벌과 지배층의 화려한 생활이 국력을 피폐하게 했다. 순장이나 갑골문에 등장하는 각종의 형벌이 말해주듯이, 상 왕실의 잔혹하고 야만적인 지배는 백성들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또한 상나라 사람들은 술을 너무 좋아해서 멸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실제로 상을 정복한 주는 이를 경계하여 음주를 특별히 단속했다.
주공, 주를 중원의 지배자로 부상시키다
기원전 1046년, 상을 멸망시킨 주 무왕은 도읍을 호경으로 옮겨 주 왕조를 개창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후 주 왕실은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주의 지배력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왕이 갑자기 죽고 그의 어린 아들 성왕이 즉위하게 된 것이다. 이때 크게 활약하여 주의 지배력을 공고히 한 사람이 무왕의 동생 주공 단이다.
주공은 동방의 거점인 낙읍을 제2의 수도로 건설하고 상의 잔존 세력의 반발을 평정했으며, 3년간의 대 동방원정을 감행하여 주를 명실상부한 중원의 지배자로 부상시켰다. 그러나 그는 끝내 왕위에 오르지 않고 성왕을 슬기롭게 보좌함으로써, 훗날 공자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치제도, 봉건제도를 창안하다
주 왕실은 점차 확대되는 영토와 주민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는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아직 청동기 단계에 불과한 당시의 기술수준에서 방대한 영토를 중앙에서 통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차피 간접통치를 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면 각 제후들을 포섭하고 통제하여 반란에 쐐기를 박을 수 있을까?
주나라 봉건제도 왕실 혈족이나 공신을 제후로 임명해 전국의 영토를 다스리게 한 봉건제도.
이때 창안된 중국 역사상 최초의 체계적인 통치제도가 바로 봉건제도(封建制度)다. 봉건제도란 직할지를 제외한 전국의 확장된 영토에 왕실의 혈족이나 공신을 제후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는 제도로, 제후는 왕에 의해 봉해져서 해마다 공물을 바치고 유사시에 병력을 지원했으나 지역의 내정에는 간섭을 받지 않았다. 종친들은 수도 가까이에 분봉하여 울타리 역할을 하게하고 공신이나 하 · 상의 후예들은 멀리 변방에 분봉하였으며 천하는 모두 왕의 땅이라는 왕토사상을 널리 유포시켰다. 생산력이 크게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나라가 광대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유효하게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봉건 제도라는 독특한 통치 제도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주나라는 정치제도에 있어서 획기적인 진전을 이룸으로써 800년간 존속할 수 있게 되었다.
봉건제도에 혈연적 특색을 가미한 종법제도, 신분 질서를 확립하다
주 왕실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봉건제도에 혈연적인 특색이 가미되었다. 이것이 종법제도(宗法制度)로 계약이라는 방식으로 맺어지는 서양의 봉건제도와 구별되는 점이며, 이후 중국 사회의 하나의 특성으로 발전하게 된다. 왕과 제후는 단순히 정치적인 군신관계일 뿐 아니라 본가와 분가의 관계, 즉 공동의 조상을 모시는 한 집안임이 강조되었다. 왕은 제후들에게 군권을 상징하는 무기와 관복을 제공하였고, 제사라는 신성한 의식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군신 관계를 확립했다.
주의 지배는 제사의식으로 완성되는 것이었으나, 상나라처럼 대규모 피의 제물을 바치는 일은 사라졌다. 이는 주의 문화가 보다 합리적으로 발전했다는 얘기가 된다. 주 왕실의 조상을 모시는 종묘가 도읍의 중심에 자리 잡은 가운데, 주가 정복한 상의 제사도 중시되어 그들의 후손을 제후국에 봉하여 조상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했다.
종법제도는 엄격한 피라미드식 신분 질서가 확립되고 독특한 예문화가 정착되는 데 기여하였다.정실 부인의 맏아들을 대종(大宗)이라 한다. 나머지는 소종(小宗)으로 대종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왕은 천하의 대종이며 왕위도 적장자 계승 원칙이 적용되게 되었다. 제후는 또 자신의 봉국 안에서는 대종이 되는 것이며, 가정으로 내려가도 마찬가지다. 철저한 위계질서가 사회 전반에 걸쳐 확립되는 것이다. 이는 주례(周禮)라는 엄격하고 치밀한 예절규범의 제정으로 강화되었다. 의식주를 비롯해 일거수일투족에 이르기까지 모두 신분에 따라 정해진 절차와 제약을 따르게 하는 독특한 중국의 예문화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는 중국의 오랜 제국들에 이어지고 중국인들의 윤리와 도덕으로 체화되어 중국적 생활방식의 하나가 되었다.
천명사상, 주 왕실의 정통성을 강조하다
아울러 '천명사상(天命思想)'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널리 유포함으로써 주 왕실의 정통성을 강조했다. 하늘은 주 무왕에게 포악한 상의 주왕을 멸하고 주 왕조를 개국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므로 상주 왕조의 교체는 단순한 무력 쿠데타가 아니라, 하늘의 뜻을 반영한 '상주 혁명'인 것이다. 이 논리에 의하면, 백성들은 불가항력적으로 주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주의 지배에 반항하는 것은 하늘을 거스르는 무서운 죄악이 되는 것이다.
‘주의 동천’, 서주시대가 끝나고 동주시대가 시작되다
기원전 771년 유목민 견융의 침입을 받은 유왕은 여산 기슭에서 살해되고, 주 왕실은 도읍을 낙읍으로 옮겨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이를 '주의 동천'이라고 하는데, 이때부터를 동주, 그 이전 시대를 서주 시대로 칭한다. 동주는 다시 춘추와 전국으로 나뉘어져 '춘추전국시대'로 불리는데, 춘추시대는 공자의 책명 《춘추(春秋)》에서, 전국은 전한시대의 저술인 《전국책(戰國策)》에서 따온 이름이다.
동주 영역기원전 770~256년 존재했던 동주. 동쪽의 낙읍이 도읍지였다.
서주의 멸망에 관해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유왕은 포사라는 후궁을 몹시 사랑했는데, 그녀는 이상하게도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보로 봉화가 올려졌다. 다급해진 제후들은 서둘러 군사를 이끌고 도읍으로 달려왔으나, 오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모두들 넋 빠진 모습이 되었다. 이를 본 포사는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왕은 그녀의 아름다운 웃음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자꾸만 봉화를 올렸다. 거듭 속아왔던 제후들은 정작 견융(犬戎)의 침입으로 주 왕실이 위기에 닥쳤을 때는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주나라의 건국 - 독특한 지배체제, 봉건제도를 채택하다 (중국사 다이제스트100, 2012. 3. 23., 가람기획)
“삼한(三韓)
정의: 삼국시대 이전 한반도 중남부지방에 형성되어 있었던 정치집단에 대한 통칭.
내용: 마한·진한·변한을 말한다. 삼한의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마한은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에, 진한과 변한은 경상도지역에 비정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한 [三韓]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위의 삼한(三韓)에 대한 기술은
성종 25년 4월 10일 무진 1번째 기사 일본 국왕(日本國王) 원의재(源義材)가 중 원국(元匊) 등을 보내어 와서 조빙(朝聘)하면서 보낸 글과는 완전히 다르다!
일본 국왕이 조빙하면서 남긴 국서에
"삼한(三韓)은 바닷가의 땅으로서 일찍이 주(周)나라 때 봉작(封爵)한 봉토(封土)를 계승하였습니다" 라고 했는데!
엉뚱하게도 한반도에 삼한(三韓)이 있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근거로 한반도(韓半島) 삼한설(三韓說)을 주장하는가?
그림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42682&cid=40942&categoryId=33402
주
중국의 고대 왕조(BC 1046∼BC 771). 상(商)나라 다음의 왕조이며, 이전의 하(夏)·상(商)과 더불어 삼대(三代)라 한다. 요(堯)·순(舜)의 시대를 이어 받은 이상(理想)의 치세(治世)라 일컬어진다. 주(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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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三韓)
①상고 시대(上古時代)에 우리 나라 중•남부에 자리잡고 있었던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弁辰).
②신라•고구려•백제의 삼국. 나아가 옛 삼한 지역을 통합한 나라들. 신라•고려.
③우리 나라.
한국고전용어사전 : 네이버 지식백과
우산, 권문세족, 근조, 압사, 호상, 희우정, 사단, 버짐, 본관, 육오, 승중상, 팔자, 도승지, 십상시, 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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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三韓)은 바닷가의 땅으로서 일찍이 주(周)나라 때 봉작(封爵)한 봉토(封土)를 계승하였습니다"
위 성종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삼한(三韓)은 주나라 강역내에 있었고,
삼한(三韓)을 계승한 신라•고구려•백제, 고려, 조선이 그 강역을 그대로 계승하였다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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