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요동(遼東)의 여진(女眞)을 접하고 서쪽과 남쪽으로는 청도(靑島)·제남(濟南)·소주(蘇州)·항주(杭州)와 일본(日本)을 접하였으니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요동(遼東)의 여진(女眞)을 접하고 서쪽과 남쪽으로는 청도(靑島)·제남(濟南)·소주(蘇州)·항주(杭州)와 일본(日本)을 접하였으니, 삼면(三面)에서 적의 침범을 받는다고 하겠습니다...

我國北接遼東、女眞, 西南接靑、齊、蘇、杭、日本, 可謂三面受敵矣。

 

 

숙종실록보궐정오 19권, 숙종 14년 6월 14일 을묘 1번째기사

1688년 청 강희(康熙) 27년

 

http://sillok.history.go.kr/id/ksb_11406014_001

 

조선왕조실록

○乙卯/吏曺判書朴世采上辭職疏, 附陳冊子, 論時務十二條。 【大條小目見上。】 其一, 論奮大志。 略曰, 匹夫之治身, 猶必立志而後, 乃底于成, 況人主可不奮大志而能有所爲乎? 其目有二。 一

sillok.history.go.kr

 

이조 판서 박세채가 올린 시무 12조

 

이조 판서(吏曹判書) 박세채(朴世采)가 사직소(辭職疏)를 올리고, 덧붙여서 올린 책자(冊子)에 시무(時務) 12조(條)를 논하였다. 【큰 조항과 작은 조목은 위에 보였다.】 그 1조(條)에서는 큰 뜻을 분발할 것을 논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필부(匹夫)가 몸을 다스리는 것도 오히려 반드시 뜻을 세운 뒤에야 성취에 이르는데, 하물며 군주(君主)가 큰 뜻을 분발하지 않고서 능히 하는 바가 있겠습니까? 그 조목이 둘이 있으니, 첫째는 왕도(王道)를 살피는 것입니다. 왕도란 인정(人情)에 근본하여 예의(禮義)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큰 길을 걸어가며 휘거나 돌아가는 바가 없는 것과 같으니, 오직 요순(堯舜)·우탕(禹湯)·문무(文武)같은 임금이라야 능히 그 도(道)에 합하여 반드시 천리(天理)의 바른 것을 얻고 반드시 인륜(人倫)의 지극함을 극진히 하였으니, 맹자(孟子)가 말한 ‘덕(德)으로써 인(仁)을 행한다.’는 것과, 동자(董子)010) 가 말한 ‘그 옳은 것을 바르게 하면서 그 이익을 꾀하지 않고, 그 도(道)를 밝히면서 그 공(功)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오패(五覇)011) 는 사술(詐術)과 폭력을 먼저 하고 인의(仁義)를 뒤로 했으니, 그 다음부터 천하가 어두워져 곡경(曲徑)012) 의 가운데서 엎치락뒤치락하며 수천 년을 왕도(王道)로 자립(自立)한 자가 없었으니, 지금은 마땅히 기필코 선왕(先王)의 치도(治道)를 회복하는 것을 기약해야겠습니다.

 

둘째는 대의(大義)를 밝히는 것입니다. 임금과 신하의 의리와, 아비와 아들의 친(親)함은 윤상(倫常)에 근본하여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그 원수와 원한이 있는데도 보복하지 못하고, 수모와 치욕이 있는데도 씻지 못한다면, 이는 진실로 삼강오상(三綱五常)의 근본에 있어서 더욱 신자(臣子)로서 태연히 있을 바가 아니니, 가의(賈誼)의 이른바 ‘발이 반대로 위에 있고, 머리가 도로 아래에 있다.’는 것이며, 대기(戴記)에 이른바 ‘임금과 아비의 원수는 세상에 같이 살지 못할 원수이다.’라는 것이며, 주자(朱子)가 이른바 ‘만세(萬世)를 두고 반드시 보복할 원수’란 것입니다. 지금 척연(惕然)히 인조(仁祖)와 효종(孝宗) 양조(兩朝)에서 당했던 일을 추상(追想)할 때를 만났으니, 아픈 마음으로 분발(憤發)해 반드시 그 내정(內政)을 정돈하고 외적(外敵)을 물리치는 실상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는 또 거듭 《춘추(春秋)》의 뜻과 삼강오상(三綱五常)의 근본에 어긋나는 것이 될 것이니, 두렵지 않겠습니까? 대개 왕도(王道)란 것은 제왕(帝王)의 떳떳한 법이요, 대의(大義)란 것은 당세(當世)의 급무(急務)이니, 뜻을 분발하여 일을 성취시키는 데는 이를 버리고 다른 적합한 뜻이 없습니다."

 

하고, 3조에는 내정(內政) 다스리는 것을 바르게 할 것을 논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가인(家人)013) 의 도(道)에 ‘오히려 여자에 정(貞)한 것이 이(利)하다.’ 하였습니다. 더구나 군주로서 몸을 닦으려고 하는 이는 또 궁내를 본보기로 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가지고 사방을 통치해야 하니, 이에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조목이 둘이 있으니, 첫째는 궁위(宮闈)를 엄격히 하는 것입니다. 대개 궁위의 의리는 여자는 안에서 위치를 바르게 하고 남자는 밖에서 위치를 바르게 하여, 내정의 말은 밖으로 나오지 않게 하고, 외간의 말은 내정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 그 대체(大體)입니다. 군주가 된 분은 한가로이 혼자 있을 즈음에도 항상 스스로 점잖고 엄숙히 하여 근엄하고 공손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조금도 게으름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늠름하게 마치 종묘(宗廟)를 받들고 군신(群臣)을 대할 때와 같이 한다면 몸가짐이 바르게 되어, 후비(后妃)에게 미쳐서는 단정하고 씩씩하며 고요하고 엄숙하여 관저(關雎)014) 의 덕(德)이 있게 되고, 후궁(後宮)은 삼가고 공경하여 소성(小星)015) 의 미행(美行)이 있게 되며, 뇌물로 알현(謁見)을 청탁하는 습관은 나아올 길이 없게 되고, 잡다한 사도(邪道)의 근심이 일어날 사이가 없게 되어, 궁성(宮省)의 은밀(隱密)한 곳이 환하여 일호의 사특함이 싹트지 못하게 되고 가도(家道)의 바르게 됨을 볼 것이니, 지금 마땅히 이로써 표준으로 삼아 능히 집을 다스리는 도(道)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근원이 맑아야 흐르는 물이 깨끗하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이 하고서도 정사(政事)가 정돈되지 않고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는 경우는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 작은 조목으로는 내수사(內需司)를 폐지하고 환시(宦寺)를 경계하고 척속(戚屬)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내수사를 폐지해야 하는 것은, 군주는 한 나라를 집으로 삼아 한 나라의 안에는 자기 몫의 수요가 아닌 것이 없는데, 위에 물건을 바치고 아랫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모두 이로부터 나오게 되니, 또 그 중에서 쪼개어 나누어 자기 사유(私有)로 하는 것이 지금 내수사를 설치한 것과 같은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대개 듣건대 그 법은 고려(高麗) 말에 시작되었는데, 우리 태조(太祖)께서 개국(開國)하여 일찍이 개혁(改革)할 것을 의논하였으나 미처 성사되지 못하고, 후대(後代)에 막대한 폐해가 되었으며, 비록 혹 제도적인 상전(常典)을 만들어 그 문서(文書)로 하여금 이조(吏曹)를 거치게 하였으나, 마침내 또한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 크게 생각을 더하여 빨리 조정(朝廷)으로 하여금 본사(本司)의 여러 관원을 의논해 정하되, 사옹(司饔)·상의(尙衣)의 제도와 같이 하여, 사사로이 모시는 사람으로는 맡지 못하게 해서 국가(國家)의 공정(公正)한 이치를 밝히는 것이 옳겠습니다.

 

환시(宦寺)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은, 근습(近習)의 환란은 예로부터 있었으니, 대개 그 자취는 비밀스럽고 정의는 친압하여 밖으로는 장엄(莊嚴)한 데에 두려워함이 없고 안으로는 아첨하는 데에 즐거워함이 있어서, 스며드는 것이 날이 오래 되면 그 스스로 술수(術數) 가운데 빠져드는 줄을 깨닫지 못하게 되니,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말세(末世)에서 분명히 징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마땅히 바른 것으로 가르치고, 엄숙하게 대하여, 다만 아침 저녁으로 물을 뿌리고 소제하는 말직(末職)에 대비하게 하고, 감히 재물과 뇌물을 통하여 외인(外人)을 교섭하여 조정의 정사를 문란하게 하지 못하게 한다면 필경 이 무리들도 몸을 보전하고 죄를 멀리하는 데에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진덕수(眞德秀)가 구사량(仇士良)016) 의 ‘천자(天子)로 하여금 글을 읽거나 유신(儒臣)을 친하게 하지 말게 하라.’는 말로 인하여 말하기를, ‘군주가 덕(德)을 닦고 학문을 강론하게 하면 천하(天下)가 편안하여 곤충과 초목도 다 살 곳을 얻게 될 것이니, 하물며 좌우(左右)의 신하로서 그 안정된 곳을 얻지 못할 자가 있겠는가?’ 하였으니, 진실로 지극한 말인 것입니다.

 

척속(戚屬)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역대(歷代) 이래로 교만하고 방자한 화(禍)가 사책(史冊)에 환하게 기재되어 거울삼아 경계하는 두 가지 일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총애받는 궁녀와 환시(宦寺)가 하류(下流)에서 나와 본래 학식(學識)이 없는 경우와 같지 않으니, 이따금 많이들 공경(公卿)의 높은 벼슬로 왕실(王室)에 연척(連戚)이 되어 뜻을 얻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스스로 잘 처신하는 도리를 알지 못하여 안전(安全)함을 얻는 이가 적으니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마땅히 군주로부터 항상 경계하고 타일러서, 그 벼슬이나 상을 주는 즈음에 인아(姻婭)·족당(族黨)의 유(類)엔 반드시 문득 그 용서하거나 후대함을 보여서 물의(物議)를 초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개 약간이라도 이와 같이 한다면 문득 궁중(宮中)과 관부(官府)가 일체(一體)가 되어 공평 정대(公平正大)함을 이루는 것이 아니므로, 유익한 것은 적고 손해되는 것은 많아서 종당에는 치평(治平)에 누(累)가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절약과 검소를 숭상하는 것인데, 반드시 군주의 덕(德)에 근원을 두어야 통행(通行)할 수 있습니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이 눕게 되는 것은 그 이치가 그렇게 되는 것이니, 진실로 이에 반대가 되면, 비록 명령을 내려도 따르지 않고 금지시켜도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사치의 폐단이 가장 큰 근심이 되니, 한 가지 진귀한 음식도 반드시 궁내의 법이라고 하면서, 많은 것을 다투고 교묘한 것을 경쟁하고, 전하여 서로 본받아서 복식(服飾)·거마(車馬)·궁실(宮室)·연음(燕飮)을 날마다 새롭게 하고 달마다 풍성하게 하여, 먹지 못할 데에 곡식을 버리고 쓸모없는 데에 재물을 버리게 되니, 비록 저 하늘의 노여움이나 백성의 원망과 흉년의 근심으로 마침내 위망(危亡)한 지경에 이르는 것을 초래하지 않으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지금 마땅히 성상께서 대우(大禹)의 음식(飮食)을 검소하게 하고 궁실(宮室)을 낮추는 것으로 마음을 먹고, 곤전(坤殿)께서는 마 황후(馬皇后)가 몸소 대련(大練)을 입은 것으로 법도를 삼아서, 궁중(宮中)에 영(令)을 내려 통쾌히 예전 습관을 고치고, 많은 용도를 절약 감손(減損)하되, 의복은 수선하여 깨끗한 것을 취하고 음식은 배를 채워 기르는 것만을 취하여, 금옥(金玉)을 기와같이 보고 금수(錦繡)를 포백(布帛)같이 보아, 궁액(宮掖)에서 시작하여 소민(小民)에게까지 이르도록 한다면, 그 덕화의 행해지는 것이 반드시 우역(郵驛)을 둔 것보다 빠를 것입니다."

 

하고, 4조에는 규모(規模)를 세울 것을 논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군주가 국가를 다스리려고 한다면, 어찌 일정한 규모를 두어 그 편벽된 것을 구제하여 중도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조목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충(忠)을 숭상하는 것입니다. 대개 본조(本朝)에서는 고려(高麗)의 말운(末運)을 이어 문(文)을 써서 정치를 하였으니, 제도(制度)와 문물(文物)이 찬연(粲然)하게 갖추어져서 족히 소중화(小中華)라 칭할 만하였습니다. 그러나 변고(變故)를 겪고 후세로 내려올수록 풍속이 퇴폐해져, 집안에서 행하는 것이 이미 순후(淳厚)하지 못하고, 나라에서 조치하는 것도 또한 구간(苟簡)017) 함이 많아져 모두가 가려서 속이는 과조(科條)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그 타고난 천리(天理)의 진실을 잃었으나 스스로 깨달아 살필 줄을 알지 못하고, 풍속과 교화가 굳세지 못하여 간교함과 거짓이 갖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 폐단을 크게 바로잡을 때입니다. 무릇 제도(制度)나 언행(言行) 사이에 반드시 혼연(渾然)히 성실하고 정확한 마음으로써 명백하고 정직하게 행사하여, 안으로는 자기를 속이지 않고 밖으로는 남을 속이지 않으며, 한결 같이 충신(忠信)·독후(篤厚)한 것으로 오래도록 변하지 않아, 아랫사람으로 하여금 감동하여 따라 감화하게 한다면, 마침내 마땅히 바르게 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엄격함을 주장하면서 관대함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대개 엄격하고 관대한 것은, 비유컨대 천도(天道)에 의해 봄은 만물을 낳고 가을은 만물을 죽이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진실로 성인(聖人)의 지극한 훈계로 《춘추(春秋)》의 중도(中道)로서, 만세(萬世)에 전할 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치(文治)의 폐단이 예로부터 인약(仁弱)한 데로 돌아갔으니, 춘추 열국(列國) 중의 노(魯)나라와 후대(後代)의 조송(趙宋)018) 에서 그 경계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혹은 서로가 열 배나 백 배로 기상(氣像)이 떨치지 못하고 기강(紀綱)이 무너져서, 문관(文官)은 능히 법을 행하지 못하고 무관(武官)은 능히 군병(軍兵)을 제어하지 못하니, 그 돌아가는 곳을 상고하여 본다면, 이는 한 가지 사무도 시행되지 못하여 종신토록 강포(强暴)에 사역(使役)될 뿐입니다. 지금 마땅히 한결같이 엄정(嚴正)한 것으로 주장을 삼으면, 거의 쇠퇴한 풍습이 갑자기 변하게 되어 사람의 마음이 따라서 복종하고, 법제로 정한 것이 바람처럼 행하여져 물과 불이라도 피하지 않을 것이니, 이런 뒤에야 천하(天下)의 일이 다스려질 것입니다. 대저 ‘충(忠)’은 진실로 삼대(三代)의 손익(損益)의 으뜸이었는데, 전한(前漢)이 이것을 얻어 세상을 다스리는 데 가장 나았습니다. 관용(寬容)과 위엄(威嚴)의 구분에 이르러서는, 왕자(王者)는 진실로 마땅히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정사를 선무(先務)로 삼을 것이니, 그러한 뒤에 어진이가 일어나서 때에 따라 의리로 제어하는 것을 제갈양(諸葛亮)이 촉(蜀)땅을 다스리고 주자(朱子)가 군(郡)을 다스린 것과 같이 할 것입니다. 더욱 뛰어난 자는 모두 이 도(道)를 썼으니, 진실로 《주례(周禮)》에 이른바 ‘난국(亂國)을 바로잡는 데 중한 법을 쓴다.’는 유(類)는 신불해(申不害)나 한비자(韓非子)의 잔약한 백성에게 각박하게 한 것과는 같지 않은 것입니다."

 

하고, 5조에는 기강(紀綱)을 진작시킬 것을 논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릇 사람이 한 가지 일을 다스리는 데도 반드시 총회(摠會)와 제설(提挈)의 도리를 안 뒤에야 밖으로부터의 모든 사무를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하물며 군주가 국가를 다스리려고 하면서 먼저 기강을 진작시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조목에 네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상벌(賞罰)을 공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상벌은 군주가 세상을 통치하는 큰 권한이니, 위에 있는 자가 공평 정대(公平正大)한 마음으로 모든 아랫사람에게 조림(照臨)하여 착하고 사특한 것을 분별(分別)해 어질고 공(功)이 있는 자는 모두 그 상을 얻게 되고, 어질지 못하며 죄가 있는 자는 모두 그 벌(罰)을 받게 된다면, 이는 장차 온 나라의 사람이 보아서 느끼며 권하고 힘써서 환하게 착한 일은 마땅히 해야 하며 악한 일은 마땅히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니, 진실로 또한 형벌이나 상을 기다리지 않고도 백성의 풍속이 저절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마땅히 단연코 성상의 마음에서 결단하시어 그 현부(賢否)를 밝히시고 그 위에 상벌로써 크게 경계하여, 대소 신료(大小臣僚)로 하여금 척연(惕然)히 두려워하고 경계하여 각각 그 직임을 완수하며, 감히 구차스럽게 남의 비위를 맞추며 고식적인 계교를 하지 못하게 한다면 거의 좋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어질고 사특한 것을 분변하는 것인데, 어질고 사특한 것은 국가의 치란(治亂)이 나누어지는 바입니다. 이이(李珥)의 말에, ‘군자(君子)는 임금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직(社稷)을 위하여 마음을 먹고 백성을 위하여 염려를 하니, 의리가 직책을 지키는 데에 있으면, 임금의 명령에도 따르지 않는 바가 있고, 말을 다해야 할 것이 있으면 임금의 위엄에도 사피하지 않는 바가 있다. 그러나 소인(小人)은 작록(爵祿)을 사랑하기 때문에, 권세가 임금에게 있으면 임금에게 아첨하고, 권세가 권행(權倖)019) 에게 있으면 권행에게 아부하며, 권세가 외척(外戚)에게 있으면 외척과 교결(交結)한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아주 절실하여 어질고 사특한 사람의 귀감(龜鑑)이 될 것입니다. 군주가 된 분은 진실로 마땅히 곧은 사람을 등용하고 굽은 사람을 버리며, 어진이를 진용하고 어질지 않은 이는 물리치되, 그 상벌(賞罰)의 바른 것을 보이고, 또 반드시 현신(賢臣)에게 대하여서는 친근히 하고 소인(小人)에게 대해서는 소원(疏遠)하게 하여, 능히 그 도를 다하는 것을 제갈양(諸葛亮)의 말과 같이 해 조금이라도 서로 뒤섞임이 없게 한 연후에야, 능히 어질고 사특한 것을 분변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 번째는 붕당(朋黨)을 없애는 것인데, 붕당이란 것은 다만 공(公)과 사(私)를 분변하는 데 있습니다. 성인(聖人)이 주비 화동(周比和同)020) 의 사이에 마음쓰기를 매우 부지런하였으니, 역대(歷代)의 화란(禍亂)이 이로부터 많이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당론(黨論)은 뿌리가 깊고 근본이 굳은 것이 다른 시대와 달라서, 본래 모두 한결 같이 사류(士流)에서 나왔으나, 나누어져 배치되는 데 이르러서는 가끔 사(邪)나 정(正)으로부터 말미암아 역(逆)과 순(順)이 되어서, 변고(變故)가 일어날 때에는 진실로 저쪽을 내치면 이쪽을 올려 주고, 저쪽을 벌을 주면 이쪽을 상을 주어야 할 것인데, 지금같이 일이 평정되어 시일이 오랜 뒤에는, 또 마땅히 중도에 나아가 제도를 정하여 명백히 분변해서 통용(通用)하여, 천선(遷善)·개과(改過)에 보탬이 있어서 빨리 그 근본에 돌아가게 하는 것을 요컨대 필연의 이치로 삼았으나, 이미 정자(程子)의 희령(熙寧)021) ·원풍(元豐)022) 때에 같이 일하던 도리가 아니고, 또 범순인(范純仁)의 원우(元祐)023) 때에 조정(調停)하던 의논과도 같지 않으니, 더욱 홍범(洪範) 황극(皇極)의 뜻에 부합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그 작은 조목은 이현(二賢)을 포양(褒揚)하고, 영남(嶺南) 사람을 수용하며, 교계(敎戒)를 엄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현을 포양해야 한다는 것은, 세상에 어진 덕이 있으나 선비가 명백히 알지 못하면, 옳고 그른 것이 섞여져서 추향(趨向)이 자못 치우쳐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본체(本體)에 밝아 용도에 적합한 도덕과,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의, 요점을 알아 간략함을 지키는 학문과 같은 것은 참으로 동방(東方)의 큰 학자(學者)로서 곧 오현(五賢)024) 을 이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쪽 사람들의 비난하는 바가 되었으며, 특히 붕당의 습관으로 대대로 전하여 옴으로써 여러 사람의 지껄이는 것이 마침내 고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조정(朝廷)에서 비록 이미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였으나, 여러 사람의 의논이 또한 크게 같지 않으니, 지금 마땅히 호남·영남의 여러 도(道)로 하여금 문집(文集)과 연보(年譜) 등 책을 각 고을의 향교(鄕校)에 인쇄해 보내고, 다시 고을 수령(守令)에게 별도로 유시하여 때로 사자(士子)들에게 강(講)하여 익히게 해서 흥기(興起)하는 바가 있게 한다면, 천리(天理)는 근본이 밝은 것이고 인심(人心)이 스스로 공정해질 것이니, 어찌 끝내 그 시비(是非)의 절충을 얻지 못함이 있겠습니까?

 

영남의 사람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은, 영남은 옛부터 인재(人才)의 부고(府庫)로 일컬어 현유(賢儒)가 많이 나왔는데, 진실로 풍습이 다른 곳과 통하지 않아서 인물(人物)이 나지 않으므로, 마침내 청명(淸明)한 조정에 발탁되어 나와서 세상에 드러난 이로서 장현광(張顯光)·정경세(鄭經世)·정온(鄭蘊)과 같은 사람이 없는 지가 지금 4기(紀)를 넘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의논이 괴격(乖激)한 소치이며, 조가(朝家)에서 포기(抛棄)한 데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드디어 근년에 권간(權奸)의 시대에 한 번 나와 사나운 불길을 조성(助成)시키는 것을 면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한 도(道)의 큰 수치라 이를 만합니다. 지금은 마땅히 밝게 분변하여 통용(通用)하는 방법으로 함께 대처해야 할 것이니, 그 중에 과연 죄루(罪累)를 입은 것이 아니고 재행(才行)이 있는 자는 특별히 발탁(拔擢)하시고, 그 허물은 작고 재행이 큰 자도 또한 차례로 선발해 천직(遷職)시켜서 진실로 마음을 낮추어 서로 따르게 한다면, 이로부터 공정하게 듣고 나란히 보게 되어 동료들끼리 협력하고 공경하여 장차 어디를 가더라도 불가함이 없을 것입니다.

 

교계(敎戒)를 엄하게 해야 한다는 것은, 옛날부터 반경(盤庚)의 천도(遷都)025) 와 주공(周公)·필공(畢公)의 풍속을 변하게 한 것이 모두 이 도리에 연유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인심은 정제(正齊)되지 못하고 여러 사람의 노여움은 범(犯)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만약 대공지정(大公至正)한 도리로써 정녕하게 교유(敎諭)하고 간곡하게 진계(陳戒)하여, 그 깊은 의심과 쌓인 원망을 확 열어서 풀리게 하지 못했다면, 능히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마땅히 주상께서 개연(慨然)히 폐단을 개혁하는 것으로 마음을 먹고,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한 통의 큰 고문(誥文)을 지어서 중외(中外)에 반포해 보이시며, 또한 반드시 근본을 끝까지 살펴서 ‘양쪽이 모두가 왕신(王臣)인데도, 다만 당론(黨論)이 서로 격(激)함으로 인하여 인심(人心)이 점차 어긋나게 되어, 비록 이로 인하여 국가(國家)를 해치고 군부(君父)를 잊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돌아보지 않으니, 결코 신자(臣子)의 도리가 아니다. 반드시 전일의 소견을 통쾌하게 고치어 마음과 창자를 씻고, 한결같이 붕당(朋黨)을 타파하여 같은 덕으로 중도(中道)를 세우는 것으로 마음먹는 것을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에 천관(天官)에게 조칙(詔勅)하여 붕당(朋黨)을 경계한 것과 같이 하라’ 한다면 거의 혹 그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네 번째는 요행(僥倖)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요행이란 것은 본래 당연히 얻지 못할 것을 얻는 것을 가리킨 것인데, 다만 덕이 없으면서 높은 위치에 있고 재주가 없으면서 아름다운 작록(爵祿)을 탐하여서 그런 것일 뿐 아니라, 그 입사(入仕)하는 데 이르러서도 오로지 전관(銓官)의 수중(手中)에 매여 있게 되어, 혹은 친척(親戚)·인아(姻婭)로써, 혹은 교분이 두텁거나 사적인 은혜로써 하는 것들이 모두 이 경우입니다. 정치의 방법을 아는 자는 깊이 경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지금 마땅히 두 전관(銓官)을 엄하게 단속시켜 그 촉탁하는 데에 관계된 자는 일체 쓰지 말고, 혹은 실수하는 바가 있으면 대각(臺閣)에서 곧 법대로 탄핵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릇 그 관직의 임명이 공정한 천거에서 나오고, 이미 거관(居官)하여 선정(善政)이 있는 자는 다시 뽑아 의망(擬望)하면 요행을 바라는 무리들은 쓰이는 바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하고, 6조에는 현재(賢才)를 구할 것을 말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릇 집 한 채를 짓는데도 공사(工師)를 선택하는데, 하물며 군주가 국가를 다스리려고 하면서 현재(賢才)를 구하여 오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조목에 둘이 있는데, 첫째는 천거(薦擧)를 논한 것입니다. 3대(三代) 이후로 학교를 세우고 선비를 기르는데, 빈흥(賓興)026) 으로 등용하는 방법이 드디어 폐지되었으니, 한 사람이라도 다스리기를 원하는 임금이 있다면, 반드시 모두 선비를 예우하고, 재주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그 뜻을 이루게 하고, 현신(賢臣)은 각각 배운 것으로 진달(陳達)하였습니다. 동중서(董仲舒)는 무재(茂才)·효렴(孝廉)으로 말하였고, 정자(程子)는 또 근시(近侍)를 예(禮)로 명하고 현유(賢儒)는 마음을 다하여 추방(推訪)해야 한다고 말하였으며, 사마광(司馬光)은 10과(十科)027) 로 선비를 뽑는 법을 두게 하였는데, 비록 주장하는 바는 약간 다르나 대의(大義)는 실로 같습니다. 이것은, 지금 이미 전해온 법을 따르고 본받아 대략 사목(事目)을 만들었으니, 성지(聖旨)에 품(稟)함을 거쳐 중외(中外)에 반포(頒布)해야 할 것이나, 반드시 다시 십분 삼가하여 선택을 더하여야만 바야흐로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통용(通用)하는 것이니, 수(隋)나라와 당(唐)나라가 과거(科擧)를 설치한 뒤로 관직(官職)에 임용(任用)하는 것을 오지로 이 길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명철한 군주와 예의를 아는 군왕은 일찍이 깊이 구애받지 않고 차례에 관계없이 사람을 쓴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 이미 현재(賢才)를 천거할 것을 논하였으니, 반드시 마땅히 통용(通用)의 방법을 상의(商議)해야 그 재능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자(程子)는 ‘반드시 연영원(延英院)을 설치하여 조칙(詔勅)에 응해서 정사를 의논하고, 그 재주와 식견, 기량과 능력을 살펴 본 뒤에 어진이는 작위(爵位)에 나가고 재능이 있는 이는 관직(官職)에 나가게 한다.’고 생각하였으니, 이는 어진이를 구하는 방법과 시험을 치르는 술책에 있어서 두 가지를 다 얻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아조(我朝)에 이르러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가 또 천거과(薦擧科)를 만들어 공용의 계제(階梯)로 삼았으니, 지금 마땅히 상의하여 그 가깝고 편리한 데 나가 행하게 하면 거의 허물이 적게 될 것입니다."

 

하고, 8조에는 제도와 정치의 법을 논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릇 의원이 병을 치료하려면 반드시 먼저 증세를 살핀 뒤에 처방을 찾아 약을 시험합니다. 하물며 군주로서 국가를 다스리려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 정령(政令)이나 제도(制度)를 좋게 하여 성취(成就)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조목에 여섯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정사(政事)를 듣는 데 부지런한 것입니다. 예로부터 정사에 부지런하지 않고서 능히 치도(治道)를 이룬 군주는 있지 않았습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조종조(祖宗朝)에는 이미 경연(經筵)에서 날마다 세 번 강론함이 있었습니다. 또 야대(夜對)와 불시(不時)에 입대(入對)하는 일과 상참(常參)·조참(朝參)이 있어, 승지(承旨)는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고, 감사(監司)·수령(守令)과 여러 고을의 진공(進貢)하는 사람을 인견하며, 재신(宰臣)이 출사(出使)한 후에 진계(陳啓)하는 등의 절차가 있었으니, 그 정사에 시행하고 호령(號令)에 발표하는 것이 부지런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며, 백관(百官)·만민(萬民)과 궁향(窮鄕)·벽읍(僻邑)에서도 모두 의견을 상달(上達)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세종(世宗)·성종(成宗)의 정치가 전고(前古)보다 뛰어났던 까닭입니다. 요즘의 제도는 경연을 여는 것이 이미 드물고 비국(備局)을 인견(引見)하는 것도 한 달에 다만 세 차례 뿐이며, 상참(常參) 이하의 여러 가지 제도는 비록 간혹 행한다고는 하나 또 실질적인 일이 없으니, 이러한 규모(規模)를 가지고 일을 다잡아 하지 않으면서 구차하게 시일만 보낸다면 마침내는 나라를 다스릴 이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 마땅히 주상께서 성심(聖心)으로 결단하여 옛 제도를 세우고 정돈하시되, 하루 사이에 음식을 드시거나 잠을 자는 때가 아니면 아예 내전(內殿)에 계시지 않으시며, 오로지 정사를 들으시고 겸하여 신료(臣僚)와 더불어 정치하는 법을 강구(講究)한다면, 스스로 모든 공적이 다 성사되는 효과에 점차로 이르게 될 것이니, 이것이 실로 정치하는 법의 큰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의정부(議政府)의 옛 제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듣건대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육조(六曹)가 여러 직책을 나누어 맡아서 여러 사무를 결재해 처리하고, 또 반드시 총괄(摠括)하여 의정부(議政府)에서 서결(署決)해야만 그제야 위에 알렸다고 합니다. 비록 군정(軍政)과 민정(民政)에 관계된 큰 일이라도 성지(聖旨)는 또한 의정부에 내리고 일찍이 본조(本曹)에 곧바로 맡기지는 않았으니, 바로 그 체통(體統)이 높아지고 사리(事理)가 성취되어 한 세상의 다스림을 넉넉히 이루게 된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갑자기 시작되었다가 갑자기 폐지되기도 했는데, 명종(明宗) 때에 이르러 마침 을묘년028) 에 왜변(倭變)을 당하자, 임시로 비변사(備邊司)를 설치하여 급한 수요(需要)에 대응하게 하고, 그 뒤 남북(南北)의 난리가 잇달아 일어나자 그대로 두어 개혁하지 못하고 전후로 백여 년 동안 예악 문장(禮樂文章)과 정사 논의(政事論議)가 모두 이로부터 나와 명분과 의리가 매우 어긋나게 되어, 마침내 장차 체통을 높이고 사리를 성취시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마땅히 옛 제도를 의논해 복구시킨다면, 먼저 비변사를 고쳐서 중서당(中書堂)으로 하고,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날마다 그 가운데 좌정하여 올라온 모든 사무를 서결(署決)하게 하고, 삼공(三公)은 이미 각각 6부(六部)를 나누어 맡게 하며, 그 큰 일에 이르러서는 또 모두가 공통으로 의논하여 품처(稟處)하게 해야만 비로소 체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삼공(三公)·육경(六卿)과 삼사(三司)의 장관(長官)과 팔도(八道)의 감사(監司)를 선발하여 임명하는 것입니다. 대개 삼공 이하의 관원을 선임(選任)하는 것은 역대(歷代)의 관제(官制)에 서로 득실(得失)이 있으나, 아조(我朝)에서 여러 관직을 나누어 설치한 것은 간략하고도 구비되어 있으니, 만약 선왕(先王)의 제도와 비교해 보더라도 그다지 어긋나고 잘못된 점이 없습니다. 지금 비록 세도(世道)가 타락하고 인재(人才)가 적지만, 다만 마땅히 중도(中道)에 나아가 여러 사람의 소망을 채택하며 큰 인재를 살펴서 전일의 공을 물어서, 그들로 하여금 각각 그 직책을 얻게 하고 임무를 맡겨서 성취를 요구하다가, 그가 감당하지 못한 후에 다시 유능한 자를 찾아서 바꾼다면, 거의 쇠퇴(衰退)하는 것을 붙들고 피폐(疲弊)해진 것을 도우며, 어지러운 것을 다스리고 위태한 것을 붙잡아서, 마침내 능히 정사(政事)를 정돈하고 덕업(德業)을 높여서 세상에 드문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작은 조목은 스스로 요속(僚屬)을 초빙하는 것입니다. 무릇 일을 다스리는 관원이 비록 지혜와 힘이 있다 하더라도 형세상 스스로 두루 다 구비할 수 없으니, 반드시 현명한 인재를 얻어서 요속(僚屬)으로 삼은 뒤에야 백사(百事)가 정돈되어 성사될 것입니다. 주(周)나라에서 백경(伯冏)029) 에게 명(命)하여 이미 ‘그대의 요속을 신중히 선발하라.’는 말이 있었고, 당(唐)나라 육지(陸贄)에 이르러 또 대성(臺省)의 속료(屬僚)는 장관(長官)에게 맡겨서 선택할 것을 청하였으니, 대개 평소부터 친하게 사귀어 본말(本末)을 상세하게 알지 못하면 그 재주를 살펴서 알아내기 어려우니, 지금 마땅히 육경(六卿) 및 팔도 감사로 하여금 각각 아는 어질고 재능이 있는 사람을 스스로 천거하여 일을 같이 하며 성사시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네 번째는 장리(長吏)030) 를 뽑는 것입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술책이 그 단서가 하나만이 아니나, 그 지극히 중요하고 지극히 절실한 것을 구한다면 장리를 뽑는 것과 같은 것이 없습니다. 장리가 진실로 어질면 세렴(稅斂)은 마땅히 가벼워지고 부역은 마땅히 균일해지며, 송옥(訟獄)은 마땅히 공평해지고 교화(敎化)는 마땅히 시행되어, 비록 혹 변고가 있더라도 기근(饑饉)이 능히 살해(殺害)하지 못하며, 전쟁이 능히 해치지 못할 것이나, 어질지 못하면 이에 반대가 될 것입니다. 한(漢)나라 선제(宣帝)는 자사(刺史)·수령을 임명하며 곧 친히 묻기를, ‘물러가서 행할 바를 상고해 살피라.’ 하고, 또 말하기를, ‘관리를 자주 바꾸면 백성이 불안할 것이다.’ 하고는 그 다스리는 효과가 있으면 문득 새서(璽書)031) 로 힘쓰도록 격려하며 직질(職秩)을 올려주었으니, 참으로 정치하는 방법을 알았던 것입니다. 지금 마땅히 이것을 반드시 먼저 하여, 특별히 전부(銓部)에 분부하고 극진히 윤선(掄選)을 가하여 사람을 잃게 하는 근심을 없도록 하며, 또 보고 묻고 상고하고 살피기를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백성이 다스려지지 않겠습니까? 그 작은 조목은 실적이 이루어지면 불러서 쓰고, 내직(內職)과 외직(外職)을 번갈아 임명하는 것입니다. 실적이 이루어지면 불러서 쓴다는 것은, 무릇 중재(中才) 이하는 격려(激勵)하고 권장(勸奬)하여 성취(成就)시키는 데 달려 있으니, 비록 잘 다스렸다 하더라도 끝내 등용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스스로 학문(學問)하고 충실(忠實)한 선비와는 달리 마음을 다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지금 마땅히 장리(長吏)로서 백성을 잘 다스린 공적과 과거의 성적이 우수하거나, 또는 평소 행의(行誼)와 학식(學識)을 겸하여 가진 자를 정밀히 뽑아서 들여보내어 구경(九卿)과 제조(諸曹)의 대부(大夫)로 삼고, 혹은 초탁(超擢)032) 하여 특이한 사람을 권장함을 보일 것입니다. 대개 황패(黃覇)를 불러서 승상(丞相)으로 삼고, 탁무(卓茂)로 포덕후(褒德侯)로 삼았거늘, 하물며 이런 등류의 관직(官職)이겠습니까? 내직과 외직을 번갈아 임명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벼슬길에 있어서 내직을 중하게 여기고 외직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음관(蔭官)이나 무인(武人)에 관계되지 않거나 스스로 서울에 살면서 명예가 드러나는 이익이 없는 사람은 일찍이 이쪽을 사양하고 저쪽으로 나가지 않으니, 그런 까닭으로 열읍(列邑)은 자제(子弟)를 양육하는 장소가 되고, 먼 곳의 백성은 도탄(塗炭)에 빠져드는 형편에 있게 되었습니다. 박할(剝割)033) 함이 비록 급박하나 조정(朝廷)에서는 들을 수 없고, 수많은 백성이 소리치면서도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지금 마땅히 당(唐)나라 제도에 의하여 대성(臺省)의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외직으로 나가고 내직으로 들어오는 것을 항상 고르게 한다면, 거의 백성의 고통이 위로 통하게 되고, 임금의 은택은 아래에 미쳐서 일대(一代)의 성치(聖治)를 조성(助成)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구임(久任)과 초천(超遷)인데, 예로부터 정치를 함에 있어서는 오직 인재를 얻는 데에 힘을 썼고, 이미 그 인재를 얻으면 반드시 구임시켰습니다. 우(虞)나라 때에 9관(官)을 종신토록 바꾸지 않았던 것과, 한(漢)나라 문제(文帝)·경제(景帝) 때 아전이 된 자가 그 곳에서 자손(子孫)을 키운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황조(皇朝)034) 의 선종(宣宗)·효종(孝宗) 때에도 모두 이 법을 썼으므로 천하가 편안하여 후세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초천(超遷)의 법은 나흠순(羅欽順)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전에 구임(久任)한 자를 뒤에 초천시키고 전에 초천한 자를 뒤에 구임시켜서, 대개 첫벼슬부터 노년에 이르도록 대략 3, 40년이 된다 하니, 아침에 제수(除授)하고 저녁에 천직시키면서 화관 요직(華官要職)을 두루 거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오늘날의 습속(習俗)과 같지 않았습니다. 안으로는 학사(學士)로부터 진출하고 밖으로는 목사(牧師)나 수령(守令)으로부터 진출하는데 반드시 7, 8관벌(官閥)035) 을 허용하게 하되, 각각 그의 장점으로써 관직에 임하여 혹은 4, 5년, 혹은 6, 7년에 마침내 반드시 경상(卿相)에 이르게 한다면, 공사(公私)가 모두 편리하여 그다지 한(恨)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마땅히 이에 의하여 한결같이 적임(適任)인 사람을 얻어 구임(久任)시키는 것을 주로 삼고 초천의 법으로써 계속한다면, 그것이 또한 정치하는 방법에 가까울 것입니다.

 

여섯 째는 출척(黜陟)인데, 출척이란 것은 실로 우(虞)나라와 주(周)나라에서 고적(考績)하던 큰 법입니다. 다만 지금 오랜 세대를 거쳤으므로 인정(人情)은 거짓이 많고 국법(國法)은 해이(解弛)해져 폐치(廢置)036) 하거나 벌을 주고 상을 주는 법은 습관적으로 허문(虛文)이 되었으니, 그 다스려지는 날이 항상 적고 어지러운 날이 항상 많은 것은 오로지 이 때문인 것입니다. 제갈양(諸葛亮)이 촉(蜀)을 다스릴 때에 법으로써 위엄을 보였으니, 법이 행하여지면 은혜를 알게 되고, 작위(爵位)로써 한계를 두었으니, 작위가 가해지면 영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충성을 다하여 시정(時政)을 말한 자에게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상을 주고, 법을 범하여 태만(怠慢)한 자는 비록 친근하더라도 벌(罰)을 주며, 죄를 자복하여 실정을 털어놓는 자는 비록 죄가 무겁더라도 반드시 석방하고, 근거 없는 말을 교묘하게 꾸미는 자는 비록 죄가 가볍더라도 반드시 죽였으니, 이는 진실로 시폐(時弊)를 바로잡는 좋은 법입니다. 지금 마땅히 크게 경계하고 신칙하여 중외(中外)에 명백히 분부하여, 출척(黜陟)을 주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결 같이 실적(實績)에 따라서 사정(私情)과 거짓을 용납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니, 만약 그렇지 않고서 반드시 주벌(誅罰)로써 뒤따른다면 인순(因循)의 근심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 작은 조목은 특별히 어사(御史)를 보내는 것이니, 또한 출척의 한 방법인데, 역대(歷代)로 행하여 왔으나, 이로움과 병폐가 서로 병립(倂立)하게 되었습니다. 주읍(州邑)에서 두려워하여 자거(刺擧)037) 하는 것이 마땅함을 얻으면 이롭고, 사실이 아닌 풍문(風聞)으로 후자(後者)가 반드시 전자(前者)보다 낫지 못하면 병폐가 되니, 오직 마땅히 그 적임자를 정밀히 뽑아서 그 말을 참고하고 생각하여 전해오는 폐단을 없앤다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9조에는 조전(祖典)038) 을 찬술할 것을 논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릇 집에 10금(金)의 재산이 있다면, 반드시 대대로 지켜서 잃지 않게 하여야만, 그제야 조선(祖先)을 욕되게 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군주로서 국가를 다스리려고 하는 분이 어찌 선왕(先王)의 성헌(成憲)을 보지 않고 변통(變通)하여 능히 지키는 책임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 조목은 경제사(經濟司)를 설치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성종(成宗) 때에 이루어져서, 금과옥조(金科玉條)가 진실로 이미 상세하고 조밀합니다. 그러나 행하여 온 지가 2백 년이 되니 하자와 폐단이 날로 나타나고, 중간에 병란(兵亂)을 겪어 혹은 폐기(廢棄)되고 혹은 바뀌어 표준이 있지 아니합니다. 지금 마땅히 이이(李珥)의 말에 의하여 별도로 한 사(司)를 설치해서, 대신(大臣)이 거느리게 하고 경재(卿宰) 이하의 관원으로서 경학(經學)에 통달하고 세무(世務)에 익숙한 자를 뽑아서 당상관(堂上官)으로 삼고, 통훈 대부(通訓大夫) 이하의 관원을 요속(僚屬)으로 삼아서, 《대전(大典)》의 본문(本文)에 의하여 상세하게 짐작(斟酌)을 가하여 그 행할 만한 것은 삼가 지키고, 그 행하지 못할 것은 별도로 변통시키며, 그 추가로 증보(增補)할 것은 또한 첨입(添入)하도록 할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경제(經濟)의 뜻입니다.

 

그 작은 조목은,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참고해 쓰고 《속록(續錄)》을 수정(修正)하며, 선정신(先正臣)의 장소(章疏)를 채택(採擇)하며, 구폐(舊弊)를 개혁하며, 새 제도를 반포(頒布)하는 것입니다. 《경제육전》을 참고해 쓰자는 것은, 헤아려 생각하고 보충해 엮어 전서(全書)를 이루려는 것이니, 바로 조종조(祖宗朝)를 위하여 좋은 법과 아름다운 뜻이 모두 이에 있습니다. 또 헤아려 보건대 그 당시는 고려(高麗)로부터 세대가 멀지 않아 사물의 이치나 사람의 심정이 혹은 전례대로 계승하여 참고해 증거할 만한 단서가 있다고 해도, 《대전(大典)》을 찬정(纂定)할 때에 등재(登載) 되지 못한 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속록(續錄)》을 수정(修正)해야 한다는 것은, 《대전(大典)》이 된 뒤로 또 《속록(續錄)》과 《후속록(後續錄)》이 모두 이미 통행되고, 각사(各使)에 쓰이는 열성(列聖)의 수교(手敎)도 또한 대부분 같지 않으니, 대개 한때의 사정(事情)이 서로 다름으로 인하여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관리(官吏)가 일에 임하여 따라 할 바를 알지 못하게 되니, 자못 작은 일이 아닙니다. 지난번에 듣건대 성상께서 근신(近臣)의 말을 써서 특별히 한 관제를 정하여 수교(手敎)를 개정(改正)하였으나, 일이 오래 되어도 마치지 못하였다고 하니, 지금 마땅히 이 두 책을 아울러 같이 수정을 가하여 새 법제에 넣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선정신(先正臣)의 장소(章疏)를 채택해야 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선조(宣祖) 이래로 명유(名儒)·현신(賢臣)이 나라를 깊이 근심하고 먼 장래를 생각하여 경장(更張)이 미치지 못함을 고민하고, 앞일을 징계하고 뒷일을 조심하여 장래가 잘 될 것을 도모하여, 각각 장독(章牘)을 올려서 부지런하고 간곡히 하여 병기(兵器)를 수리하고 백성을 구하려는 뜻을 차례대로 갖추어 열거하였습니다. 그리고 계해년039) 의 반정(反正)에 이르러서 안으로 포악한 정치를 겪고 밖으로는 큰 적(敵)을 당하였으나, 한때의 여러 신하들이 또한 충성을 다하고 계책을 내어 증세를 살피고 약을 쓰는 것이 요점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오늘에 와서 헤아려 보건대 비록 그 말이 혹은 쓸 만하기도 하고 혹 그렇지 않은 것이 있기도 하며, 그 폐단이 혹 그대로 있기도 하고 혹 없어지기도 하였지만, 요컨대 마땅히 참고하고 채택해서 그 제도를 보완시켜야 할 것입니다.

 

옛 폐단을 혁파해야 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법의 폐단과 백성의 고통은 진실로 소장(疏章)으로 거론(擧論)하기가 어려우니,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에 여러 신하들이 상소하여 논한 바를 열 가지에 그 두세 가지도 행하지 못한 것은 위에서 아뢴 바와 같습니다. 근년의 경화(更化)하던 처음에 또한 일찍이 각도(各道)·군(郡)·읍(邑)에 폐막(弊瘼)을 물어보았으나, 끝내 시의(時議)에 제지(制止)되어 능히 변통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그 가장 심한 것을 말한다면 아문(衙門)이 날로 새로이 창설(創設)되고 날마다 많이 설치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밖으로는 둔전(屯田)에서 백성을 모아들이고 안으로는 돈을 축적하여 재화(財貨)를 유통시키는데, 반드시 대신(大臣)으로 총괄하게 하고, 제장(諸將)으로 관할(管轄)하게 했으며, 훈련도감(訓鍊都監)·어영청(御營廳)·수어청(守禦廳)·총융청(摠戎廳)·금위영(禁衛營)·관리청(管理廳) 등이 생기자 병부(兵部)는 그 직책을 잃게 되고, 선혜청(宣惠廳)·상평청(常平廳)·진휼청(賑恤廳) 등이 생기자 호부(戶部)는 그 직책을 잃게 되어, 작위(爵位)가 높고 세력이 중한 사람에 이르러서는 대간(臺諫)이 감히 논하지 못하고 집정(執政)에서도 감히 결단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시장(柴場)·염분(鹽盆)·어전(漁箭) 등은 오히려 이 속에 포함되지 않았으니, 이는 공적으로 나라를 해치는 것입니다. 국속(國俗)에 있어서 노비(奴婢)의 법과 같은 것은 중조(中朝)040) 에는 없는 바인데, 위로는 여러 궁가(宮家)와 사대부(士大夫)로부터 아래로 시정(市井)에 이르기까지 무릇 스스로 서민(庶民)과 다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것을 중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으니, 반드시 노비를 많이 사서 대대로 역사(役使)시키려고 합니다. 그리고 장업(庄業)까지도 또 각각 설치하여 혹은 부유(富有)한 정도가 천백(阡陌)을 연하기도 하고, 권세는 수재(守宰)를 제지(制止)하기도 하여, 관청에서는 세금을 거두지 못하고 관리는 간악한 짓을 고발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나라의 금령이 시행되지 못하고 경상(經常) 수입(收入)이 날마다 축소되는데도, 입안(立案)041) ·원당(願堂)042) ·협호(狹戶)043) 등은 오히려 이 속에 포함되지 않았으니, 이는 사적(私的)이면서도 나라를 해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부세(賦稅)가 번거롭고 까다롭게 되자, 양민(良民)과 천인(賤人)은 입작(入作)044) 에 많이 투신하고, 신역(身役)이 갑절이나 무거워지자, 군보(軍保)는 거의 도고(逃故)에 걸려들었습니다. 경작(耕作)의 조세(租稅)는 전과 같은데도 넓은 땅이 다 묵어 황폐한 데로 들어가고, 관리가 농간을 부리므로 적곡(糴穀)은 매양 포흠(逋欠)하는 데로 걸려 들어갑니다. 불교(佛敎)가 오히려 남아 있으므로 장정(壯丁)은 놀기만 하고 게으른 데에 모두 돌아가고 무풍(巫風)이 더욱 번성하므로 재물은 요괴하고 허탄한 데에 허비됩니다. 이 외에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치는 것들은 두목(頭目)·명색(名色)이 한두 가지로 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어찌 가난하지 않겠으며, 백성이 어찌 살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통곡(痛哭)하고 눈물을 흘리며 길이 탄식할 일입니다. 지금 마땅히 크게 다스려서, 그 공사(公私) 두 폐단에서 많은 것을 덜어내고 나누어진 것은 합치며, 지나친 것은 재단(裁斷)하고 나쁜 것은 삭제(削除)하여 각각 제한(制限)이 있게 해야만, 거의 위로 조종(祖宗)의 제도를 따르고 아래로 신민(臣民)의 죄를 끊게 될 것이니, 그 큰 것을 이와 같이 한다면 그 세미한 것은 제지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제(新制)를 반포(頒布)한다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올바른 사람이 있으면 정사가 행해지고 올바른 사람이 없으면 정사가 행해지지 못하는 것은 그 이치가 진실로 그러한 것이니, 또한 사람이 없다는 것으로 법을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이미 폐단이 되는 정치를 고쳐서 조전(祖典)을 찬술(纂述)하려 한다면 마땅히 한 책을 저술하되 이름을 《속대전(續大典)》이라고 해서, 영원히 후세에 전하여, 후일 법을 따르는 군주와 법을 잘 지키는 신하로 하여금 지키고 따르게 하여 위로는 나라가 다스려지고 아래로는 백성이 편안하여 오래도록 무너지지 않는 데에 이르게 된다면 그제야 크게 바르게 될 것입니다. 대저 이 일은 《대전(大典)》의 미진(未盡)한 것을 갖추려고 하는 것인데, 황조(皇朝)에서 《회전(會典)》을 수정(修正)한 유(類)와 같음을 볼 수 있으니, 단지 조종(祖宗)의 전하는 뜻을 본받고, 신료(臣僚)의 넓은 의논을 채택하여, 옛날의 폐해를 고쳐서 일대(一代)의 제도를 새롭게 하려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와 같이 한 뒤에야 정치하는 방법을 변통(變通)할 수 있고 이루어짐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그 군정(軍政)을 정리하는 것을 논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새란 하찮은 미물이나, 도리어 둥지의 틈을 얽어매어 걱정을 예방하는 방도를 다합니다. 하물며 적(敵)을 제어하려고 하는 자가 어떻게 군정(軍政)을 크게 정돈하지 않고 외모(外侮)를 막는 준비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조목이 넷이 있으니, 첫째 내정(內政)입니다. 선왕(先王) 때에 사마(司馬)045) 의 관제를 제정하여 병졸을 농촌에 장치(藏置)하고 많은 나라를 다스렸는데, 관중(管仲)이 비로소 내정의 법을 만들었으니, 궤범(軌範)으로 다 향촌(鄕村)을 연결시킨 것입니다. 이는 또한 시왕(時王)의 제도를 연습(㳂襲)한 데서 나온 것이나, 삼군(三軍)으로 나누어 고국(高國)046) 으로 하여금 거느리고 봄·가을로 사냥하게 하였는데, 실은 오로지 군대(軍隊)를 다스리는 데에 뜻을 두고 빨리 제후(諸侯)에게 뜻대로 되기를 바랐으니, 이것이 바로 왕도(王道)와 패도(霸道)의 순정(醇正)과 자하(疵瑕)047) 의 구분입니다. 그러나 환공(桓公)이 대적한 것은 형제(兄弟)인 이웃 나라에 지나지 않지만, 오늘의 대적하는 것은 곧 이적(夷狄)인 원수들이니, 그 이치가 진실로 다르고, 국력의 강하고 약하며, 군사가 많고 적은 상황과 우리나라를 위협하고 속박하는 형세는 스스로 상도(常度)로 대처(對處)하기가 어렵습니다. 성인(聖人)이 말한 ‘일에 임해서는 두려워하고, 꾀를 좋아하여서 성사시킨다.’는 것도 또한 이것을 버리고는 다른 계책이 없으니, 지금은 마땅히 그 법을 본받지 않더라도 그 뜻은 취해야 할 것입니다. 무릇 훈련(訓鍊)과 방비(防備) 등의 일에 있어서 일체 조용하고 신중한 방법으로 실행하여 남의 듣고 보는 것을 번거롭게 하지 않는 것이 이 당시의 의리에 있어서 큰 것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군제(軍制)를 정하는 것입니다. 주실(周室)에서 비려(比閭)048) 에 대오(隊伍)를 둘로 한 뜻은 오래 되었고, 당(唐)나라가 일어나면서 비로소 부병(府兵)을 만들어 좋은 법이라 하였으나, 개원(開元)049) 이후로부터 그 제도가 점차로 변하여졌는데, 게다가 번진(蕃鎭)이 병란(兵亂)을 선동하게 되니, 이로 인하여 장정(長征)050) 의 군졸을 이루게 되어, 병제(兵制)와 농정(農政)이 드디어 나누어졌으므로, 천하가 도탄(塗炭)에 빠졌습니다. 진실로 부병의 폐단은 나약한 데로 돌아가니, 나약하면 싸우기가 어렵고, 장정의 폐단은 교만한 데로 돌아가니, 교만하면 양성하기 어렵게 됩니다. 화란(禍亂)이 처음 평정(平定)될 때에는 나라의 형세가 장성(壯盛)하여 비록 민오(民伍)를 사용하더라도 넉넉히 방어에 대비할 수가 있었지만, 전쟁이 이미 일어난 뒤에는 적병(敵兵)이 날래고 빨라서 평소부터 연습한 강하고 날랜 군사가 아니면 대응(對應)할 수가 없으니, 그 형세상 두 가지를 폐지할 수 없습니다. 이제 마땅히 다시 경제(經制)를 만들어서 옛날 세금을 따져 군사를 뽑던 뜻을 본받고, 특별히 정밀하게 뽑아 잘 양성시키는 계책을 생각하여 시의(時宜)에 적절하게 해야만 그제야 변통(變通)의 뜻에 합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 작은 조목에는 오위(五衛)를 복구하고 친병(親兵)을 정밀하게 뽑는 것입니다. 오위를 복구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 고려 태조(高麗太祖)가 실제로 당(唐)나라를 섬기게 되자, 그 병제(兵制)를 본받아 육위(六衛)를 만드니, 상하(上下)가 서로 유지되고 체통(體統)이 서로 연결되어 한때 편안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숙종(肅宗)이후로 여진(女眞)의 병란을 만나 이 제도도 또한 바뀌어졌고, 아조(我朝)에 이르러 또 5위를 만들어 진관(鎭管)의 법을 만드니, 사족(士族)과 양민(良民)이 마침내 모두 예속(隸屬)되었는데, 시행된 지 이미 오래 되매 점차 무너져 폐지되니, 거의 병혁(兵革)051) 을 마음에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도이(島夷)052) 가 쳐들어 오게 되자 팔도(八道)가 함락(陷落)되었는데, 다행하게도 중국 조정에서 군사를 보내어 구원해 주었으므로 큰 난리가 평정되었습니다. 이에 다시 속오군(束伍軍)을 설치하여 사천(私賤)과 잡류(雜類)를 막론하고 향병(鄕兵)으로 만들게 되자 5위가 곧 폐지되었고, 단지 면포(綿布)만 상납(上納)하였습니다. 이제 마땅히 옛 제도를 다시 복구시켜서 사족과 양민으로 하여금 항오(行伍)에 편성(編成)하여야만, 거의 의리에 의하여 충성을 다하려는 마음이 있게 되고 짐승처럼 놀라서 흩어지게 되는 근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친병을 정밀하게 뽑아야 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군사는 정예(精銳)한 것을 귀하게 여기고 수효가 많은 데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른바 훈련도감(訓鍊都監)이란 것은 유성룡(柳成龍)에게서 비롯한 것이요, 이른바 어영군(禦營軍)이란 것은 이귀(李貴)에 의하여 창설(創設)되었으니, 대개 여러 번 난리를 겪으면서 때에 따라 제도를 제정하는 일을 했던 것인데, 그 후 정묘년053) ·병자년054) 의 난리에 마침내 그 힘을 얻게 되었으니, 이는 곧 친병(親兵)의 효과입니다. 일찍이 듣건대 효종(孝宗)께서는 한(漢)나라 때의 남군(南軍)·북군(北軍)의 제도에 본받았다고 하니, 그 뜻은 진실로 그러합니다. 다만 어영군(御營軍)은 스스로 그 보인(保人)에게서 먹는 것을 취하고 훈련도감의 병졸은 반드시 대농(大農)을 기다려서 반급(頒給)하니, 나라의 용도가 많이 모자라게 됩니다. 지금 마땅히 훈련도감의 병졸을 정밀하게 뽑아 대략 3, 4천 명으로 하여 연하(輦下)의 친병(親兵)으로 만들고, 또 어영군에 금위청(禁衛聽)을 합쳐서 융통(融通)해 상번(上番)하게 하면, 반드시 3, 4천에 밑돌지 않을 것이고, 별대(別隊)의 호위청(扈衛聽) 이하 각종 군대도 또한 1, 2천을 거느리고 있으니, 이와 같이 하면 식량을 마련하는 방법이 증가하지 않아도 병력(兵力)이 저절로 강하여져서, 비록 큰 적(敵)을 만나더라도 병졸이 없어서 싸우지 못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장재(將材)를 뽑는 것입니다. 공벌(攻伐)하는 세상에서는 장재를 저절로 곧 볼 수 있으나, 보통 무사할 때는 위대한 식견(識見)이나 기이한 감식(鑑識)이 없으면 그 형세가 진실로 어렵습니다. 옛날 이를 논하는 자는 혹은 군대의 대오(隊伍) 중에 나아가 찾아내고, 혹은 대신(大臣)과 근신(近臣)에게 명하여 각각 문관(文官)·무관(武官) 중에서 병법(兵法)에 밝으면서 위엄과 과단성이 있는 자를 천거하게 하여, 지략(智略)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활쏘고 말타는 것으로써 시험하지 않았다고 하니, 구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어찌 그 효과가 없겠습니까? 또 반드시 그 인품(人品)이 분명하고 공적이 나타남을 기다린 뒤에 번곤(藩閫)·대장(大將)의 직임에 뽑아 두더라도 불가한 바가 없습니다. 이제 마땅히 대오(隊伍)의 사람으로 하여금 그 능히 장수의 임무를 감내할 만한 사람을 의논해 뽑아서, 그로 하여금 군사를 다스리게 하고, 다시 실효(實効)를 보아서 차차 올려 쓰게 할 것입니다. 또 제신(諸臣)으로 하여금 추천하고 보증하게 하여, 만약 뛰어난 자가 있으면 특별히 초탁(超擢)을 가해야만, 그제야 군정(軍情)을 용동(聳動)시켜 그 죽을 힘을 다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작은 조목에는 병법(兵法)을 강론하는 것입니다. 장수가 되는 방법과 군사를 움직이는 요점과 전진(戰陳)에 임하는 법은 모두 전(傳)과 기(記)에 있으나, 기회(機會)에 따라 적(敵)에 응하고 기병(奇兵)·정병(正兵)의 변화(變化)에 이르러서는 마음으로 깨닫고 정신으로 이해하여 문자(文字)를 기다리지 않고서 환하게 아는 자가 아니면 서로 미칠 수가 없으니, 이와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 쉽게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제 마땅히 장수가 될 자로 하여금 병가(兵家)의 칠서(七書)와 팔진도설(八陳圖說)을 모두 가져와서 읽고 설명하여 음미(吟味)하다가, 진실로 막히는 데가 있으면 서로 함께 강론하고 이해하여 종일(終日)토록 행진(行陳) 대적(對敵) 중에 있는 것과 같이 한다면, 그들이 다른날에 공을 거두는 것이 매우 뛰어날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네 번째는 훈련을 밝게 하는 것입니다. 선왕(先王) 때에는 대사마(大司馬)가 사시(四時)로 진려(振旅)055) 하여 발사(茇舍)056) 하며 군사를 다스리는 것이 모두 법도가 있었으므로, 병졸(兵卒)은 장수의 의도를 알고 장수는 병졸의 실정을 알아, 임기응변(臨機應變)함에 있어서 고계(告戒)를 기다리지 않아도 자연히 마음과 뜻은 안에서 운행되고, 손과 발은 밖에서 응하게 되었습니다. 효종(孝宗) 이래로 군기(軍器)를 다스리고 군사를 훈련하는 것이 마치 시일(時日)이 부족한 듯하였으므로, 양국(兩局)057) 의 군사들을 정예(精銳)하다고 일컬었으니, 족히 일국(一國)의 강병(强兵)이 될 수 있었으나, 세월이 이미 오래 되매 가르치는 법이 혹 해이해졌습니다. 이제 마땅히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예에 의하여, 옛 법을 참고하고 교열(校閱)058) 을 게을리 하지 않게 하며, 또 반드시 인의(仁義)와 절제(節制)의 뜻으로써 거듭 가르친다면, 거의 진(秦)나라와 초(楚)나라의 단단한 갑옷과 날카로운 병기(兵器)라도 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 작은 조목은 기계(機械)를 수선하고, 양자(粮資)를 저축하며, 전마(戰馬)를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적과 더불어 우열(優劣)을 다투는 자는 남북(南北)의 형세와 병기(兵技)의 장점과 단점을 살펴 헤아릴 필요도 없이 그 단점은 버리고 그 장점은 취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화포(火砲)는 북에 유리하고 호시(弧矢)는 남에 유리하니, 각각 그 마땅함이 있습니다. 병자년059) ·정축년060) 난리 후로 국가(國家)에서 이에 마음을 쓰는 것이 정중할 뿐만 아니라, 그 각각 군문(軍門)을 설치하게 되어서는 다시 전담해 다스릴 것을 힘쓰게 하여 수선(修繕)의 계획으로 삼았으니, 지금 마땅히 예전에 장치한 병기(兵器)를 더 만들어내고 정교하게 단련하며 단단하고 날카롭게 하여 실용에 적합하게 하고, 다시 여러 기술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을 시험해 구하여 그 실효에 이르게 해야 할 것입니다.

 

양자(粮資)를 저축해야 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록 임진년061) ·정유년062) 에 천병(天兵)063) 이 경내에 몰려오던 날일지라도 군량(軍糧)은 풍부하게 한결같이 경내에서 내어야 했고 다른 데서 구하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돌아보건대 근래에 흉년이 해마다 들지 않는 해가 없어 공사(公私)의 창고가 텅 비어 있으니, 죽어가는 백성을 구제할 길도 없는데 또 어떻게 전대나 배낭에 양식을 담아 바야흐로 군대가 행진하는 준비를 하겠습니까? 지금 마땅히 미리 헤아리고 생각하여 한결같이 여러 상사(上司)와 각 아문(衙門)의 남아돌며 급하지 않은 비용을 가져와서 별창(別倉)에 모아두어 전쟁이 발생할 때의 용도로 삼고, 또 양서(兩西) 관향사(管餉使)에게 축적(蓄積)하여 대비할 것을 거듭 밝힌다면, 식량이 없는 것은 근심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전마(戰馬)를 갖춘다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북적(北敵)과 다투는 데는 보병(步兵)으로는 격투(格鬪)할 수가 없으니, 반드시 전마(戰馬)를 얻은 뒤에야 달리고 활쏘기에 편리할 것입니다. 국중(國中)에서 생산되는 말이 진실로 막북(漠北)064) 과 같이 많기는 어려우나, 탐라(耽羅)065) 이하 여러 섬으로부터 양목(養牧)하는 것을 모아 계산하면, 그 수가 수만(數萬)에 밑돌지는 않을 것이고, 비록 역로(驛路)에 남아도는 말도 생각건대 반드시 매우 많을 것이니, 지금 마땅히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는 무사(武士)로 하여금 직접 가서 스스로 전마를 고르게 하고, 별도로 규정과 약속을 정하는 것을 대략 이이(李珥)가 논한 것과 같이 한다면, 무신(武臣)만이 각각 전마를 얻을 뿐만 아니라, 또한 쓸모 없던 것을 변경하여 쓸모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고, 그 12조에는 오로지 수어(守禦)하는 것을 논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릇 나아가서는 적병과 서로 힘을 겨루게 되는데, 반드시 물러나서도 적병이 이기지 못하게 한 뒤에야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적(敵)을 제어하려고 하는 자가 어떻게 오로지 수어의 계책을 다스리지 않고, 마침내 이루어짐이 있겠습니까?

 

그 조목이 셋이 있으니, 첫째는 산성(山城)을 수축(修築)하는 것입니다. 동방(東方)으로 말하면 산성이 가장 장점이 되니, 안시성(安市城)에서 당나라 병사를 물리친 것과 영원성(鴒原城)에서 거란(契丹)을 방어한 것과 귀성(龜城)에서 몽고(蒙古)를 막아낸 것을 상고하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임진년(壬辰年)·정묘년(丁卯年)의 싸움에 행주(幸州)·용골(龍骨)에서 승리를 거둔 데서 더욱 그 명백한 증험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나라 사람의 성품은 겁이 많고 나약하며 무서움을 타는데도, 주현(州縣)의 치소(治所)066) 가 평지(平地)에 많이 있으니, 무릇 큰 난리를 만나면 문득 달아나 살 길을 구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미리 형세(形勢)를 위하여 산성을 설치하고, 그 의지할 곳을 만들어서, 이곳을 떠나면 죽고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살아남는다는 것을 알게 해주지 않는다면, 아무리 높은 성과 깊은 못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장차 버리고 떠나갈 것입니다. 지금 마땅히 한결같이 유성룡(柳成龍)이 말한 ‘그 지세(地勢)가 험준하여 지킬 만한 곳을 골라서 곧 읍치(邑治)067) 를 만들고, 난리에 임해서는 들어가 지키라.’고 한 것에 의하여 곳곳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적병(敵兵)의 침범은 근심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 작은 조목은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청야(淸野)068) 하는 것입니다. 산성을 수축하여 이미 들어가 지키고, 그 들판을 깨끗이 치워서 노략질할 인민(人民)이나 곡물이 하나도 없게 한다면, 적병은 성 밖에 있으면서 진격해도 의지할 데가 없고, 후퇴해도 돌아갈 데가 없을 것이니, 반드시 장차 오래 버티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북로(北虜)처럼 매양 늦은 가을 얼음이 얼 때에 닥친다면, 그 경작(耕作)하여 수확(收穫)하는 데 있어 마침내 방해될 것이 없습니다. 지금 마땅히 평상시에는 성에 내려가 농사를 짓고, 위급할 때 임해서는 성에 들어가 보수(保守)하게 한다면, 적을 막는 술책에 요점을 제시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둘째는 행영(行營)을 설치하는 것입니다. 큰일을 해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요, 진실로 대의(大義)를 분발(奮發)하고 화란(禍亂)을 감정(勘定)하여 세상에 드문 기이한 공을 이루려고 한다면, 진실로 예전대로 상도(常度)에 따라 장수를 명하여 군사를 내보내는 일로 진작(振作)시켜서 용동(聳動)시킬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군주가 몸소 스스로 변방을 순행하며 여러 장수를 격려하는 것을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가 환궁(還宮)한 지 6일 만에 곧 다시 나가 정벌하고, 송(宋)나라 진종(眞宗)이 계책을 결정하여 친히 정벌한 것과 같이 한 뒤에야만 바야흐로 백성으로 하여금 윗사람을 친하고 어른을 위하여 죽는 의리가 있게 할 것이며, 사졸(士卒)이 적을 대하여 의분(義憤)을 느끼고 왕을 위해 막는 뜻을 있게 할 것입니다. 지금 마땅히 한결같이 행영을 평양(平壤)이나 혹은 안주(安州)에 두어서, 사변이 있으면 주상께서 나가 순행하여 상벌(賞罰)을 행하고 전쟁과 방수(防守)를 의논하고 사변이 없으면 대신(大臣)을 뽑아 명하여 그곳에 살면서 지키게 하며, 모든 것은 절제(節制)를 더하여 편의(便宜)에 따라 행사(行事)하게 하면, 이것이 적당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셋째는 연변(沿邊)에 대진(大鎭)을 설치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요동(遼東)의 여진(女眞)을 접하고 서쪽과 남쪽으로는 청도(靑島제남(濟南소주(蘇州항주(杭州)와 일본(日本)을 접하였으니삼면(三面)에서 적의 침범을 받는다고 하겠습니다그러나 해로(海路)는 수(隋)나라와 당(唐)나라로부터 다시는 개척(開拓)되지 못하였고, 원(元)나라 세조(世祖)의 위험으로도 곤고하여 일본에 뜻을 얻지 못하였으며, 임진년(壬辰年)의 난리에 명(明)나라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만리(萬里)에 군사 내보내는 것을 모두 연경(燕京)과 계구(薊丘)로부터 나오게 하였으니, 반드시 그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육지의 경우, 요동은 관서(關西)로부터 그 뒤에 세 강(江)이 가로막고 있고, 여진(女眞)은 관북(關北)으로부터 그 뒤에 험요(險要)한 세 고개가 있어, 또한 막아 지킬 방도가 없지 않으니, 반드시 그 지형(地形)에 따라 다시 관방(關防)을 만들고, 또 반드시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사람을 임용한다면 거의 평상시에는 보장(保障)의 조심성이 있게 될 것이고, 사변을 만나면 수어(守禦)의 실효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직 서쪽과 북쪽 두 변방과 해서(海西)·호서(湖西)의 연해(沿海) 여러 곳에 군(郡)·읍(邑)을 합쳐서 하나로 할 것을 의논해 각각 대진(大鎭)을 만들고, 아문(衙門)을 건설(建設)하고, 군무(軍務)를 전적으로 다스려, 먼저 적병이 우리를 패퇴시킬 수 없는 형세로 만든 뒤에야 큰 공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작은 조목은 토병(土兵)을 모집하고 둔전(屯田)을 설치하며, 여러 섬을 개발하고 수전(水戰)을 익히며 전함(戰艦)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병졸을 징발하여 변방을 지키는 것은 예전에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니, 그 수어(守禦)하는 것을 수자리에 가서 유둔(留屯)하는 군사에게만 전적으로 책임지울 수는 없는 것이니, 반드시 토병을 많이 모집하여 그 생활을 후하게 하고 지형(地形)을 살피면서 병기(兵技)를 익히게 하여, 안으로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고 밖으로는 복종할 준비가 있게 된 뒤에야 능히 그 힘을 얻을 것입니다. 지금 마땅히 관서(關西)·관북(關北)의 관찰사(觀察使)에게 명하여 민병(民兵)을 모집하고 대오(隊伍)를 단결하게 하여, 은밀히 부륵(部勒)069) 을 행하고, 때때로 또 사냥하여 위급할 때에 사용하게 하면, 병졸을 징발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입니다.

 

둔전을 설치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군사를 쓰는 법에 현재 있는 식량을 중하게 여겼으니, 비록 제갈양(諸葛亮)의 충성과 계책으로도 군사를 동원하여 북방을 정벌할 때에 군량이 여러 번 떨어졌기 때문에 대업(大業)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그 다른 것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두 변방에는 스스로 해운(海運)의 방도가 있어서 진실로 육지로 수송(輸送)하는 노고는 없습니다. 그러나 군사는 편안히 앉아서 먹을 수가 없고 백성만 홀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으니, 지금 마땅히 대략 주자(朱子)의 설(說)에 의하고 역대(歷代)로 행하던 바 의논을 참작하여, 변방의 공지(空地)에 나아가서 훈련하는 여가에, 능력에 따라 논밭을 갈아 씨를 뿌리게 하고 적임자를 뽑아 주관하게 하여 그 법을 이루게 해야 할 것입니다.

 

-  하략 -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요동(遼東)의 여진(女眞)을 접하고 서쪽과 남쪽으로는 청도(靑島)·제남(濟南)·소주(蘇州)·항주(杭州)와 일본(日本)을 접하였으니, 삼면(三面)에서 적의 침범을 받는다고 하겠습니다.

我國北接遼東、女眞, 西南接靑、齊、蘇、杭、日本, 可謂三面受敵矣。

 

 

 

숙종실록 기사대로 그린 지도

 

1. 제남(濟南)

2. 청도(靑島)

3. 소주(蘇州)

4. 항주(杭州)

5. 일본(日本)

6. 여진(女眞)

 

 

현재의 지리와는 전혀 맞지않는 조선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나?

 

 

 

 

“청야 전술

청야 전술(淸野 戰術)은 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이다. 견벽청야(堅壁淸野)라고도 한다. 방어측이 자발적으로 사용하는 초토화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수의 1차 침입),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에서 활용되었다. 세계적으로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나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활용하였다.“ (위키백과)

 

 

 

한반도에서는 청야작전이 효과가 떨어진다!

삼면이 바다여서 어디든지 상륙하여 아군 부대에 군수품 조달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륙 깊숙한 곳에서의 청야전술은 효과가 있을 것이다!  

 

 

 

숙종 14년, 1688년 6월 14일

 

이조 판서 박세채가 올린 시무 12조에 나온

조선의 강역 설명은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요동(遼東)의 여진(女眞)을 접하고 서쪽과 남쪽으로는 청도(靑島)·제남(濟南)·소주(蘇州)·항주(杭州)와 일본(日本)을 접하였으니, 삼면(三面)에서 적의 침범을 받는다고 하겠습니다.”이다.

현재의 동북아시아에서는 불가능한  숙종실록 기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