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기사

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고 하였는데

진실한사람2 2022. 11. 6. 08:27

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고 하였는데, 남북을 조금 길게 하여 마치 버들잎 모양처럼 만들면...

 

 

정조실록 39권, 정조 18년 1월 15일 계묘 1번째기사

1794년 청 건륭(乾隆) 59년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801015_001

 

조선왕조실록

○癸卯/上登覽邑基, 謂左右曰: "此地本是空曠大野, 人家僅爲五六戶, 而今則千餘民戶, 屋舍櫛比, 不出數年, 居然一大都會。 地理之興旺, 自有其時矣。" 仍登八達山, 周覽築城基址。 上曰: "此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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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성 축조에 대해 하명하다

 

상이 높은 곳에 올라 고을터를 바라보고 곁에 모신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곳은 본디 허허벌판으로 인가가 겨우 5, 6호였었는데 지금은 1천여 호나 되는 민가가 

즐비하게 찼구나. 몇 년이 안 되어 어느덧 하나의 큰 도회지가 되었으니 지리(地理)의 

흥성함이 절로 그 시기가 있는 모양이다.“

 

하였다. 인하여 팔달산(八達山)에 올라 성 쌓을 터를 두루 살펴보고 상이 이르기를,

 

"이곳은 산꼭대기의 가장 높은 곳을 골라잡았으니 먼 곳을 살피기에 편리하다. 기세가 

웅장하고 탁 트였으니 하늘과 땅이 만들어낸 장대(將臺)라고 이를 만하다. 지금 깃발을 

꽂아놓은 곳을 보니 성 쌓을 범위를 대략 알겠으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의 인가를 철거하자는 

의논은 좋은 계책이 아닌 것같다.

 

현륭원이 있는 곳은 화산(花山)이고 이 부()는 유천(柳川)이다(땅을 지키는 사람이 

()임금에게 세 가지를 축원한 뜻007) 을 취하여 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고 하였는데 

()자와 화()자는 통용된다화산의 뜻은 대체로 8백 개의 봉우리가 이 한 산을 둥그렇게 

둘러싸 보호하는 형세가 마치 꽃송이와 같다 하여 이른 것이다그렇다면 유천성(柳川城) 

남북이 조금 길게 하여 마치 버들잎 모양처럼 만들면 참으로 의의가 있을 것이다어제 화성과 

유천의 뜻을 이미 영부사에게 언급한 바 있지만이 성을 좁고 길게 하여 이미 버들잎 모양처럼 

만들고 나면 북쪽 모퉁이의 인가들이 서로 어울려 있는 곳에 세 굽이로 꺾이어 천(자를 

상징한 것이 더욱 유천에 꼭들어맞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아(貳衙)008) 에 이르러 배종하는 시임과 원임의 대신 홍낙성 등을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까 팔달산에서 멀리 바라보니 영부(營府)가 웅장하고 여염(閭閻)이 즐비하여 참으로 큰 

도회지였다. 5, 6년 안에 취락을 이루고 도회지를 형성하는 것이 이렇듯 빨랐으니 내 마음의 

기쁨은 진실로 한량없다. 성터의 형세에 대해서는 이제 막 감독하는 당상관에게 하교하였다. 

이 성을 쌓는 것은 장차 억만 년의 유구한 대계를 위함에서이니 인화(人和)가 가장 귀중한 

것이다. 또 먼 장래를 생각하는 방책을 다해야 하는데, 아까 성터의 깃발 세운 곳을 보니 성 

밖으로 내보내야할 민가가 있었다. 어찌 이미 건축한 집을 성역(城役) 때문에 철거할 수 

있겠는가. 이는 인화를 귀중히 여기는 뜻이 아니다. 성지(城池)의 남쪽과 북쪽 사이의 거리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가까운 결점이 있으니먼 장래를 생각하는 방도에 있어 더욱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화산과 유천이 서로 바라보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억만 년 유구한 태평 시대를 여는 기업이 될 

것이다성을 쌓을 때 버들잎 모양을 본뜨고 내천 자의 형태를 모방하여 구불구불 돌아서 

기초를 정하고 인가들도 성 안에 들어와 살게 해야 할 터인데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낙성 등이 아뢰기를,

 

"전하의 계책은 신들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이아의 뒤에 있는 작은 동산에 올라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평지 가운데서 이 언덕이 갑자기 우뚝 솟아올라 이아의 터를 만들었으니 어찌 기이하지 

않은가.“

 

하였다. 이어서 일자문성(一字文星)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이 의논드리기를,

 

"이곳의 일자문성은 겹으로 되어 있고 용연(龍淵)의 모래 삼각주[砂角]가 왼쪽으로부터 

안으로 들어와서 옷깃을 여민 형국으로 되었습니다. 그러니 내문성(內文星)에 성을 쌓되 

성의 형태를 조금 축소하여 모래 삼각주에 뒤지게 하고 외문성(外文星)에는 따로 토성(土城)을 

쌓아 내성을 보호하게 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유수 조심태에게 이르기를,

 

"이 성을 곧장 외문성에 쌓되 용연의 모래 삼각주와 내문성을 넘어가게 해서 모두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면 좋겠다.“

 

하였다. 인하여 용연에 나아가 귀봉(龜峰)을 가리키면서 심태에게 이르기를,

 

"오른쪽은 귀봉이고 왼쪽은 용연이어서 거북과 용이 서로 마주하고 있으니 그 이름 역시 

우연하지 않다.“

 

하였다. 대체로 용연 기슭은 앞면이 석벽(石壁)으로 되어 있고 아래에는 작은 소()가 있는데

그 물은 광교산(光敎山)에서 흘러나와 석벽 아래에 이르러 물이 돌아 흐른다이곳에서 휘돌아 

나와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읍치(邑治)를 경과하는데기슭을 따라가다가 꺾여 지는 곳에 

장차 다리를 걸쳐놓고 성을 쌓아 수문(水門)을 만들려는 것이다. 상이 심태에게 이르기를,

 

"일자문성이 두 겹으로 되어 있으니 더욱 두껍고 공고한 기상을 보겠고, 용연의 기슭이 용의 

머리로 되어 있고 석벽이 웅크린 것처럼 솟아 있으니 풍기(風氣)가 응결되어 매우 활기찬 

기상이 있음을 볼 수 있으며, 겸하여 수해(水害)를 막는 공이 있게 되었으니 마치 이 성 쌓는 

역사를 위하여 만들어 놓은 곳인 듯하다. 지리와 지세가 매우 좋아서 오늘 살펴본 뒤로 나의 

마음은 매우 만족스럽다. 성을 쌓는 역사의 큰 줄거리는 이러하니, 예컨대 여기에 윤색(潤色)을 

더하는 데에 있어서는 이를 맡아 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하였다. 미륵당 고개[彌勒堂峴]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잠시 쉬면서 승지에게 이르기를,

 

"언제나 현륭원에 갔다가 돌아올 적에는 나의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더디어지고 

배양재[陪養峙]를 지나 이 고개에 이르면 절로 고개를 들고 서성거리게 된다.“

 

하였다. 사천(沙川) 행궁에 이르러 잠시 쉬고 과천 행궁에 이르러 오늘밤부터 내일 밤까지 

통행금지를 완화하라고 명하였다. 이어 성문은 관광하는 사람들이 다 들어가기를 기다려 

빗장을 잠그라고 명하였다. 망해정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가 환궁하니 밤 2경이 넘었다.

 

 

【태백산사고본】 39책 39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438면

【분류】과학(科學) / 왕실(王室) / 군사(軍事)

 

[ 007] 요(堯)임금에게 세 가지를 축원한 뜻 : 요임금이 화(華) 지방을 돌아볼 때 그곳을 

지키는 봉인(封人)이 세 가지를 축원한 일. 곧 장수(長壽)·부(富)·다남자(多男子)로 후세에 

송축(頌祝)하는 말로 쓰인다. 《장자(莊子)》 천지(天地).

[ 008] 이아(貳衙) : 감영 소재지에 있는 군아(郡衙).

 

 

 

 

 

성을 쌓는 데에 든 비용이 거의 80만에 가까운데

 

정조실록 45권, 정조 20년 11월 9일 경술 2번째기사

1796년 청 가경(嘉慶) 1년

 

http://sillok.history.go.kr/id/kva_12011009_002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45권, 정조 20년 11월 9일 경술 2번째기사 1796년 청 가경(嘉慶) 1년 《화성성역의궤》가 완성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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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성역의궤》가 완성되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완성되었다. 상이 화성 유수(華城留守) 조심태(趙心泰)

에게 이르기를,

"성을 쌓는 데에 든 비용이 거의 80만에 가까운데, 소중한 역사를 조금이라도 구차하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나의 본래 생각이었다. 이 책을 간행하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성의 공사에 

관한 본말을 분명히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화성성역의궤》를 간인하라고 명하다

 

순조실록 3권, 순조 1년 7월 28일 임인 4번째기사

1801년 청 가경(嘉慶) 6년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107028_004

 

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 3권, 순조 1년 7월 28일 임인 4번째기사 1801년 청 가경(嘉慶) 6년 《화성성역의궤》를 간인하라고 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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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성역의궤》를 간인하라고 명하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간인(刊印)하라고 명하였는데, 사복시 정(司僕寺正) 

홍원섭(洪元燮)이 당초 성역(城役)을 할 때에 주관하여 간검(看檢)하였던 까닭으로 간인을 

감독하게 하였다.

 

선조(先朝때 일찍이 정리한 여러 신하들에게 

화성의 성역을 마무리한 전후의 제도 의식을 순서에 따라 저술하라고 명하였으므로 상세하게 

갖추어 기록하여 의궤를 모아 완성하니무릇 9()이었다.

 

 

 

 

선조(先朝때 일찍이 정리한 여러 신하들에게 

화성의 성역을 마무리한 전후의 제도 의식을 순서에 따라 저술하라고 명하였으므로 상세하게 

갖추어 기록하여 의궤를 모아 완성하니무릇 9()이었다.

 

순조실록 3권, 순조 1년 9월 18일 임진 2번째기사

1801년 청 가경(嘉慶) 6년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109018_002

 

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 3권, 순조 1년 9월 18일 임진 2번째기사 1801년 청 가경(嘉慶) 6년 화성성역의궤를 반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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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성역의궤를 반포하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반포하였다. 선조(先朝때 일찍이 정리한 여러 신하들에게 

화성의 성역을 마무리한 전후의 제도 의식을 순서에 따라 저술하라고 명하였으므로 상세하게 

갖추어 기록하여 의궤를 모아 완성하니무릇 9()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간인(刊印)하여 

반포하였는데, 감인(監印)한 각신(閣臣) 이하에게 상을 베풀고 찬집(纂輯)한 낭관(郞官) 

홍원섭(洪元燮)에게는 통정 대부(通政大夫)의 자급을 더하였다.

 

 

 

 

 

 

“현륭원이 있는 곳은 화산(花山)이고 이 부(府)는 유천(柳川)이다. 화(華) 땅을 지키는 사람이 

요(堯)임금에게 세 가지를 축원한 뜻을 취하여 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고 하였는데 

화(花)자와 화(華)자는 통용된다. 화산의 뜻은 대체로 8백 개의 봉우리가 이 한 산을 둥그렇게 

둘러싸 보호하는 형세가 마치 꽃송이와 같다 하여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유천성(柳川城)은 

남북이 조금 길게 하여 마치 버들잎 모양처럼 만들면 참으로 의의가 있을 것이다. 어제 화성과 

유천의 뜻을 이미 영부사에게 언급한 바 있지만, 이 성을 좁고 길게 하여 이미 버들잎 모양처럼 

만들고 나면 북쪽 모퉁이의 인가들이 서로 어울려 있는 곳에 세 굽이로 꺾이어 천(川) 자를 

상징한 것이 더욱 유천에 꼭들어맞지 않겠는가.“

 

“성지(城池)의 남쪽과 북쪽 사이의 거리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가까운 결점이 있으니, 먼 장래를 

생각하는 방도에 있어 더욱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화산과 유천이 서로 바라보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억만 년 유구한 태평 시대를 여는 기업이 될 

것이다. 성을 쌓을 때 버들잎 모양을 본뜨고 내천 자의 형태를 모방하여 구불구불 돌아서 

기초를 정하고 인가들도 성 안에 들어와 살게 해야 할 터인데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버드나무 잎

 

 

 

 

화성행궁도에 그려진 화성

 

 

 

 

화성박물관에 있는 화성 전도

 

 

 

 

 

“[화성능행도 8폭병풍,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본]

 

 

 

 

 

[화성능행도 8폭병풍 서장대성조도,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본]

 

 

 

 

 

 

 

 

[출처] 화성능행도 8폭 병풍, 서장대성조도, 낙남헌방방도|작성자 대교약졸"

https://blog.naver.com/damool38/220940975599

 

 

 

“수원화성의 4대문

정조가 살던 200여년 전

수원화성은 어떤 모습이였을까? 팔달산 아래 화성행궁을 두고

위 아래로 장안문과 팔달문 양 옆으로

화서문과 창룡문이 보인다.“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8876511&memberNo=2468247

 

수원화성 걷기 (200년전 역사속으로~)

[BY 호빗교수] 수원화성의 4대문 정조가 살던 200여 년전 수원화성은 어떤 모습이였을까? 팔달산 아래 ...

m.post.naver.com

 

 

 

 

회본조선정벌기(絵本朝鮮征伐記)에 나오는 조선 지도중에서 수원군 부분

 

 

 

수원군(水原郡)에서 두 개의 물길이 시작된다!

 

 

 

 

현재의 수원

 

 

 

 

수원(水原)이라는 지명(地名)과 달리 수원(水原)이 없다!

 

 

 

 

현재의 화성

 

 

 

 

 

 

 

화성의 지형도

 

 

 

 

 

 

[화성능행도 8폭병풍 서장대성조도,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본]  그림과 같이

화성행궁을 위치시키면

 

 

 

 

 

위 그림과 같은 모양이 되어서

남북이 조금 길게 하여 마치 버들잎 모양처럼 만들면 참으로 의의가 있을 것이다.

정조 임금이 말한대로 버드나무 잎모양이 아니다!

 

 

 

 

 

화성성역의궤

 

 

 

 

 

 

 

 

화성전도-화성전도도설

 

 

 

 

 

 

 

“선조(先朝) 때 일찍이 정리한 여러 신하들에게 화성의 성역을 마무리한 전후의 제도 의식을 

순서에 따라 저술하라고 명하였으므로 상세하게 갖추어 기록하여 의궤를 모아 완성하니, 

무릇 9편(編)이었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조선의 화성 성곽 축조에 관한 경위와 제도, 의식 등을 기록한 책. 규장각도서. 화성전도.

정의: 조선시대 화성성곽(華城城郭) 축조에 관한 경위와 제도·의식 등을 기록한 책.

 

내용: 권수(卷首) 1본편(本編) 6부편(附編) 3권의 10 10.

정조 18년(1794) 1월부터 정조 20년(1796) 8월에 걸친 화성성곽의 축조는 큰 토목건축 

공사로서 많은 경비와 기술이 필요하였으므로, 그 공사 내용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겨야 

하겠다는 뜻에서 정조가 봉조하(奉朝賀) 김종수(金鍾秀)에게 편찬을 명령, 1796년 9월에 

시작하여 그 해 11월에 원고가 완성되었고, 이어 1801년(순조 1) 9월에 인쇄 발간되었다.

책의 구성은, 책머리에는 이 책의 편찬방법·경위·구성방침을 실은 범례가 있고, 권수에는 

본편과 부편의 총목록을 실은 총목(總目)과 성곽축조에 관계되는 일지를 실은 시일(時日), 

성곽축조 및 의궤편찬에 관한 관청의 관리명과 담당업무를 실은 좌목(座目), 그리고 성곽과 

각종 건조물과 공사에 사용된 부재(部材)와 기계·도구 등의 그림 및 그 설명을 실은 

도설(圖說)을 수록하였다.

권1에는 성곽축조 기본계획을 실은 주략(籌略), 왕의 명령을 실은 전교(傳敎), 왕의 말을 

실은 윤음(綸音), 왕이 내린 문서를 실은 유지(有旨), 왕이 전달한 지시를 실은 전령(傳令), 

연석(筵席)에서의 왕의 자문과 이에 답한 내용을 실은 연설(筵說), 왕에게 올린 

상주문(上奏文)과 그 결과를 실은 계사(啓辭)를 수록하였다.

권2에는 성곽에 관하여 왕이 만든 시문(詩文)을 실은 어제(御製), 왕이 활을 시사(試射)한 

내용을 실은 어사(御射), 신하에 내린 녹봉(祿俸)을 실은 반사(頒賜), 왕이 하사한 음식 내용을 

실은 호궤(犒饋), 포상규칙을 실은 상전(賞典), 의식에 관한 절차를 실은 의주(儀註), 행사와 

공사진행에 관한 절차를 실은 절목(節目) 및 각종 고유문(告由文:중대한 일을 치른 뒤에 그 

내용을 적어 사당이나 신명에게 알리는 글)·상량문·비문(碑文)을 수록하였다.

권3에는 현장에서 왕 또는 상관(上官)에게 올린 보고문을 실은 장계(狀啓), 왕에게 올리는 

문서에 덧붙인 문서를 실은 별단(別單), 관청간의 조회문(照會文)을 실은 이문(移文)을 

수록하였다.

권4에는 동급관청에서 온 공문을 실은 내관(來關), 상급관청에서 온 공문을 실은 감결(甘結), 

왕의 허가를 받아 사용한 물건의 품목과 양을 실은 품목(稟目), 공사진행상의 규칙을 실은 

사목(事目), 공사에 관한 전례(前例)를 실은 식례(式例), 동원된 기술자의 종류와 이름 및 

종사일수를 실은 공장(工匠)을 수록하였다.

권5·6에는 전공사에 사용된 물품의 종류와 수량을 실은 재용(財用)을 상·하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부편 1에는 화성에 소속된 행궁(行宮)·공해(公廨)·단묘(壇廟)·정거(亭渠)·

역관(驛館)에 관하여 그 위치와 그에 소속되는 시설·규모 등을 수록하였고, 부편 2에는 

전교·연설·계사·어제·어사·절목·고유문·상량문·장계·별단·이문·내관·감결의 항으로 되었고, 

부편 3에는 재용이 수록되었다.

이 책은 그 내용만으로도 중요한 학술자료가 되지만, 정교한 활자나 높은 수준의 인쇄술을 잘 

나타낸 표본적인 서적으로도 귀중한 것이다.

그 밖에도 조선 후기 축성공사의 실태와 무기 발달에 대응한 축성법을 잘 나타냈고, 대역사에 

소요된 물동량과 경영의 본말을 알 수 있어서 사회경제사적으로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책은 

규장각도서 중의 화성행궁본(華城行宮本) 속에 포함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화성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위의 정보를 종합하면!

 

정조 임금님은 화성을 남북이 길고 동서가 좁은 

버들잎 모양처럼 건설하라고 했고!

버들잎 모양의 원래 화성의 그림이 현존하고 있다!

 

순조 1년, 1801년 9월 18일, 9편으로 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인쇄하여 반포하였는데,

권수(卷首) 1권, 본편(本編) 6권, 부편(附編) 3권의 10권 10책으로 

된 책이 남아있다!

 

화성은 1997년 12월4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창덕궁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는데!

 

과연 현재의 수원(水原)이 정조 임금 때의 수원(水原)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