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와 소인의 구분은 오직 의(義)와 이(利) 이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입니다
군자와 소인의 구분은 오직 의(義)와 이(利) 이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입니다
"선조수정실록 21권, 선조 20년 3월 1일 경인 1번째기사
1587년 명 만력(萬曆) 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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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21권, 선조 20년 3월 1일 경인 1번째기사 1587년 명 만력(萬曆) 15년 성균 진사 조광현·이귀 등이 스승 이이가 무함당한 정상을 논한 상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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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 진사 조광현·이귀 등이 스승 이이가 무함당한 정상을 논한 상소문
성균 진사 조광현(趙光玹)·이귀(李貴) 등이 상소하여, 스승 이이(李珥)가 시배(時輩)들에게 무함(誣陷)당한 정상을 극력 논하였는데, 모두 수만언(數萬言)이었다.
【이때 조정 논의가 성혼(成渾)·이이(李珥)의 당에 대한 공격을 거르는 날이 없었다. 선비로서 성혼·이이의 문정(門庭)에 조금이라도 가까이한 자는 차례로 배척당하였다. 그래서 성혼·이이를 위하여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관학 유생(官學儒生)이 오현(五賢)의 종사(從祀)001) 를 청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유생들을 불러 모으고는 상소 끝머리에 ‘정도(正道)를 그르치고 진리를 어지럽히며 이름을 낚고 성예(聲譽)를 구하였다.’는 등의 말을 몰래 첨가하여 성혼·이이를 공격하였는데, 전일 성혼·이이를 존숭하던 무리들도 모두 알지 못하고서 거기에 서명하였다. 이귀의 이름도 거기에 들어 있었으므로 이귀가 성내어 동료를 거느리고 소장을 갖추어 이를 변명하고자 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이 화를 두려워하여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유독 조광현과 소장을 지어 동서(東西) 논의의 수말(首末)을 두루 진달하는 한편 조헌(趙憲)의 논의가 치우쳤음을 말하고 힘써 손순(遜順)하여 중도에 맞게 하려 하였는데 조광현은 그것은 감히 하지 못하였다. 이귀가 이에 이경진(李景震)을 시켜 별도로 상소하게 하고 그가 지은 소장도 올렸다.】
그 소장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삼가 아룁니다. 신이 지난번에 어리석고 미천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문득 봉장(封章)을 올려 죽은 스승을 위하여 원통함을 송변(訟辯)하였으니, 스스로 천위(天威)를 범하여 죄가 용서될 수 없음을 압니다. 그러나 지금 일이 국론(國論)에 관계되고 비방이 사문(師門)에 미친 것을 보게 되어서는 감히 끝내 입을 다물라는 경계를 지켜 한 마디 말을 하여 죽은 스승의 마음을 밝히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요즘 공주 제독(公州提督) 조헌(趙憲)이 소장을 올려 일을 말하였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윽고 그 소장을 얻어 읽어보고는 위연(喟然)히 탄식하여 ‘조헌은 우리 당(黨)의 선비인데 그 말이 중도에 맞지 않고 사실에 어긋남이 이러함에 이르렀으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바랄 것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아, 죽은 스승이신 이이의 평생은 붕당(朋黨)을 세우지 아니하고 오직 힘을 다해 사류(士類)를 보합하여 시세의 어려움을 구제하려고 도모하였는데 뜻을 품고서 성취하지 못하고 불행히 마음과 힘을 다해 애쓰다가 죽자 국사가 한 번 패하게 되었으므로 신들은 매우 가슴 아프게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이이가 죽은 뒤부터 그의 언론과 풍지(風旨)가 전혀 전해짐이 없고 곧 중도에 맞지 아니한 말이 배류(輩流)들 사이에서 나올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신들은 생각건대, 죽은 스승은 평일 학자들과 말을 할 적에는 의리의 문자에 관한 것이 많았고 조정의 시비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적었습니다. 그러므로 후생들 사이에는 혹 죽은 스승의 의논을 모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조헌의 말에 이르러서는 사문(師門)의 종지와 크게 다를 뿐만 아니라 또한 사론(士論)의 거조에도 해로움이 있었으니, 문생이 된 자로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죽은 스승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동지·후생들 몇 명과 각기 듣고 본 바를 참고하여 죽은 스승이 평생 조정에 벼슬하면서 했던 언론과 심적(心跡) 가운데 현저하여 알 수 있는 것을 대강 기술하였습니다. 먼저 죽은 스승의 지극히 공정한 논의를 진달하고, 다음에 조헌의 일방적인 말을 설파하여 기어코 세상에 드러내어 밝히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도 반드시 듣고 싶지 아니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소장이 이미 작성되자 다시 수정자(守靜者)의 말에 동요되어 의논이 귀일되지 않아서 그만두었습니다.
신들의 의견으로는 사람은 군사부(君師父) 세 가지에서 생성되었으므로 하나같이 섬겨야 한다고 여깁니다. 지금 부모에게 원통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화복과 이해를 헤아리지 않고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수정(守靜)하자는 말에 동요되어 그만둔다면 의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는 의의가 없는 것입니다. 신들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죽은 스승의 심사(心事)를 기어이 드러내어 밝히고야 말겠다. 그렇게 해야 죽은 스승의 평일의 논의를 신명시킬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 불쌍히 여겨 재결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옛날 동서로 당파가 나뉘어질 적에 조짐은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에게서 일어났으나 실지는 전후배(前後輩)의 사이가 서로 좋지 못한 데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였으므로 같은 사류(士類)이면서도 의심과 간격이 일어나 참소와 이간이 행해져서 결국 배척이 유발되었으니, 이것이 동서의 당이 처음으로 나뉘어지게 된 이유입니다. 그러나 당초에는 모두 사류였지만, 심의겸과 김효원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지 않게 됨에 따라 전후배의 사이가 서로 좋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조정에는 성대한 화기가 있었는데, 두 사람의 친구로서 조정에 벼슬하고 있는 자가 각각 시비를 다투어 서로 합일되지 못하게 된 뒤에야 같은 동아리끼리 상종하면서 서로 번갈아가며 결점을 헐뜯고 사람마다 편견을 고집하여 서로 승부를 다투었습니다. 을해년002) 에는 서인이 요로를 담당하고 을해년 이후에는 동인이 용사(用事)하여 서로 공격하였는데, 계미년에 이르러 괴란(壞亂)이 극도에 달하였습니다.003)
아, 사람이 한 세상을 삶에 있어 사해 안이 모두 형제인데 하물며 같은 나라에 태어나서 같은 조정에서 죽는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런데 동인이니 서인이니 주창하여 한 나라가 둘로 나뉘어지고 같은 배에 탄 사람이 적국이 되고 한 집안이 호인(胡人)이나 월인(越人)처럼 남남이 되어,아래로는 사대부의 뜻을 어지럽게 하고 위로는 명주(明主)에게 근심을 끼쳤습니다. 그리하여 분분하게 전도되어 달이 가고 해도 다하도록 끌고 가서 국가의 일을 일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밀어 넣었으니, 이것은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참으로 통곡하고 눈물 흘리고 길이 탄식할 만한 일입니다.
이이는 국외(局外)의 사람으로 국사를 담당한 자의 혼미함을 환하게 보고는 ‘양쪽이 모두 전후배인데 그들의 심사를 다 알 사람은 나만한 사람이 없으니, 내가 화해시키지 아니하면 누가 따르겠는가.’ 하고, 곧 조정에 드러내 놓고 말하기를 ‘서인도 사류이고 동인도 사류이다. 사류가 서로 공격하는데 어느 한쪽을 도와주거나 어느 한쪽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 마땅히 양쪽을 다 옳게 여겨 함께 존립시키고 잘 개유(開諭)하여 화해시켜야 조정이 편안해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어지러워진다.’ 하였는데, 전후배가 그 말을 듣고 감히 그르다고 하지는 못하였으나 또한 그 말대로 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이이가 일찍이 근심하게 된 까닭입니다.
당초 심의겸이 김효원을 윤원형(尹元衡)의 문객(門客)이라 하여 전랑(銓郞)의 천거를 막았는데,김효원은 또 심의겸을 어리석고 거친 외척이라 하면서 요직에 앉힐 사람이 못 된다고 하였습니다.이 두 사람은 모두 소견에 의거한 것으로 애당초 사심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심의겸의 무리들은 김효원이 원한을 갚는 소인이라 하였고, 김효원의 무리는 심의겸을 멋대로 하려는 조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전배인 사류는 후배가 김효원에게 편당을 든다고 의심하고, 후배인 사류는 전배가 심의겸을 두둔한다고 의심하였습니다.
아, 심의겸·김효원 스스로가 전배와 후배의 사류에게 부종(附從)한 것이지 사류가 심의겸·김효원에게 부종한 것은 아닌데, 이제 이에 편당이 되어 두둔한다는 것으로 서로 의심하니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로부터 붕당이 나뉘어 각각 대립하여 언론이 분분해짐에 따라 그 형세가 서로 용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충성을 다해 나라를 근심하고 공도(公道)를 행하고 사정(私情)을 잊어버리며, 초연하게 우뚝이 서서 동서 붕당에 물들지 않은 사람은 오직 이이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온 조정의 백관이 팔짱만 끼고 감히 한 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는데도 이이만은 홀로 그것을 근심하였습니다. 이에 양쪽을 억제할 계책을 내어 ‘난의 조짐은 오직 심의겸·김효원 두 사람이 시비를 다투는 데에서 나올 뿐인데, 이는 국가의 일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 두 사람을 외방으로 내어 보내면 쟁투의 단서가 절로 종식되고 국사도 잘 될 수 있을 것이니 이는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의견으로 그때의 우상 노수신(盧守愼)에게 말하였더니, 노수신 또한 그렇게 여겼습니다. 이에 주상께 계품하여 심의겸은 개성 유수(開城留守)에, 김효원은 부령 부사(富寧府使)에 제수하였습니다.
또 ‘이 두 사람이 대단한 죄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외직으로 내보낸 것은 다만 당론을 없애려 한 것일 뿐이다. 지금 심의겸은 좋은 지방을 제수받고 김효원은 나쁜 지방을 제수받았으니, 벌이 고르지 아니하여 불가하다. 뿐만 아니라 김효원은 병이 중한 사람이니, 만일 변방에 갔다가 쓰러져 죽게 되면 성조(聖朝)에서 신하를 몸처럼 아낀다는 뜻에도 어긋난다.’ 하고는, 곧 이 의견으로 독계(獨啓)하여 그를 구제하였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서인만이 이이가 김효원에게 사정을 둔다고 의심할 뿐만 아니라 위에서도 또한 김효원에게 편당든다고 의심하였습니다. 서인의 친구들도 그 사이에 의심을 두지 않는 이가 없어,뜬 의논이 왁자하여 오래도록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 이이가 어찌 김효원에게 사정을 둘 사람이겠습니까.
두 사람이 쫓겨난 뒤에 동인의 형세는 조금 꺾였고 서인의 지론(持論)은 한쪽으로 치우쳤습니다.윤현(尹晛)은 들뜨고 경박하여 김효원의 무리를 배척하는데 편중이 너무 심하였습니다. 이때 정철(鄭澈)이 호남에 있으면서 뜬 소문에 자못 의혹되어, 이이가 김효원을 사적으로 두둔한다고 의심하였습니다. 이이가 파주에 있으면서 정철에게 글을 보내어 깨우쳐 주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부터 나의 소견이 형의 뜻에 맞지 않았으니 진실로 구차히 같이하기는 어렵다. 다만 형과 나 사이에는 마땅히 말을 다하여 서로 바로잡아 주어야 하는데, 조금도 가르쳐주는 말이 없으니 유감이 없지 않다. 형이 다른 벗에게 보낸 서찰을 보게 되어서는, 거기에 곡절을 갖추어 다 써서 나로 하여금 듣도록 하였으니, 이는 불설지교(不屑之敎)004) 로서 후의를 받음이 깊다. 시비를 변명하고 싶지는 않으나 끝내 입을 다물고 있기가 어려우므로, 일의 수말(首末)을 진술하겠다.
김효원은 인물이 본디 행동이 가볍고 심지가 얕은 사람이다. 그러나 논의가 강개(慷慨)하고 일을 당하면 강직하고 과감하였으니 당초 어찌 나만이 취할 만한 사람으로 여겼겠는가. 형도 버리지 않았다. 지난 여름·가을 이래로 형의 소견이 전과 아주 달라져서 걱정스러운 사람으로 여긴다 하기에 내가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형의 말이 확고해졌다는 말을 듣고는 점차 의심을 두게 되었는데, 좌상(左相)을 추고(推考)하고 중회(重晦)를 내치기를 청한 뒤에야 나의 의심이 더욱 깊어졌다. 살펴보니 그들 동배(同輩)는 성대하게 서로 부추기고 추천하여 권세의 기염이 있기에 이르렀다. 내 생각으로는, 만일 그 예봉을 조금이나마 꺾지 않으면 반드시 뒤 폐단이 있을 것이고 장차 붕당의 근심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므로 두 사람을 외직으로 내보낼 계책을 하고서 우상(右相)에게 통지하였다. 그 뒤에 또 경연 석상에서 드러내놓고 아뢰면 도리어 분란이 일게 될까 염려하여 두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처리하도록 하려 하였으니, 그 계책은 그들의 예봉을 꺾어 누그러뜨리고 진정시키려는 데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 의사를 미처 다시 우상에게 통지하기 전에 마침 간원이 계사를 올려 이조의 직에서 갈렸는데, 좌상이 도리어 심의겸의 세력이 편중된 것을 의심하여 경석에서 갑자기 아뢰었다. 김효원이 부령 부사에 임명된 뒤로 저 연소한 무리들이 이로 인하여 모두 간담이 서늘해졌고, 공심(公心)으로 중립하던 사람도 또한 그 과중함을 근심하였다.그러나 평일 김효원과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한 사람은 떼지어 일어나 통쾌하다고 하였으므로 논의가 왁자하게 시끄러워져서 그치지 않았다. 내 의견으로는, 김효원은 병이 중하니 만일 변경에서 쓰러져 죽게 된다면 도리어 사류(士類)가 불안하게 여길 것으로 생각되었으므로 내지(內地)로 옮기자고 계달하였다. 일의 시종은 이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흔들리어 안정하지 못하여 잠시 버렸다가 잠시 취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또 이 사람에 대해 형은 형편없는 소인으로 반드시 국가를 혼란케 하고 사류를 도륙하는데 이를 것이라 하지만 나는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여긴다. 만일 공론이 동조하면 기세를 얻어 능히 그 뜻을 행할 것이지만 만일 공론이 허여하지 않으면 반드시 옆길이나 지름길로 무리하게 들어가기를 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요직에 앉으면 일을 그르칠 것이나 다른 사람에게 부림을 받으면 그 재능이 또한 취할 만한 것이 있다. 따라서 지금은 그 기세를 줄이는 것은 가하지만, 너무 심하게 미워하여 심각하게 다그치다 보면 반드시 사류의 불안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내 의견이 이러하였으므로 마침내 형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던 것이다. 내가 형으로 하여금 나를 위하지 못하게 한 것이 또한 형이 나로 하여금 형을 위하지 못하게 한 것과 같다.
바야흐로 오늘날 김효원이 세력을 잃고 있어서 깊이 근심할 것이 없는데 형은 매양 후일의 재앙을 염려하니, 이는 그렇지 않다. 만일 그의 인품이 일체 형의 말처럼 털끝만큼도 틀리지 않아서 후일 다시 요로에 올라 눈 한번 흘긴 작은 원한도 반드시 갚아 사림을 참벌(斬伐)한다면 형은 선견지명이 있는 것으로 웃음을 머금고 지하에 들어가서도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으리니 그 죽음이 영광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간신을 두둔한 악명을 백세도록 씻지 못할 것이니 구차히 사는 것이 욕스러우리라. 후일의 근심은 나에게 있는 것이요 형에게 있는 것이 아닌데 형이 근심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저들이 전성할 때에는 제배(儕輩)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오히려 한 마디 말이라도 새어 나가면 곧 큰 재앙을 당할까 두려워하더니, 외방으로 나간 뒤에는 또 범을 동여매듯이 하고자 하여 경중을 헤아리지 않고 오직 심각하게 공격하려고만 하는가 하면 또 장차 가까운 자리에까지 파급시켜 인심이 흉흉해지게 하고 있는데, 모두 형의 힘을 빌어 중함으로 삼고 있다. 나는 아마도 계속 이렇게 할 경우 일을 그르치는 책임이 형에게 있게 되고 나에게 있게 되지는 않을 듯하다. 형이 만일 이 세상을 잊지 않는다면 마땅히 병을 참고 올라와서 시세를 살피고 적의함을 헤아려서 사림을 안정시키는 것이 가한데, 어찌하여 날마다 분노하면서 불평스런 기운을 쌓고 떠도는 말을 가벼이 믿고서 의심해서는 안 될 것을 의심한단 말인가!’
여기서 말한 좌상은 박순(朴淳)이고 우상은 노수신(盧守愼)을 가리키며 중회(重晦)는 김계휘(金繼輝)의 자(字)입니다.
또 글을 보내어 논쟁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이미 세상을 담당할 희망이 없고 형도 조정에 돌아올 의향이 없으니, 동이(同異)의 소견은 버려두고 논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형과 나의 사이에 서로 다 이해하지 못한 점이 있으니 옛 사람이 서로 친애하는 도리가 아니므로 이에 다시 한 마디 말을 한다.
형이 나를 의심하는 것은 진실로 옳다. 다만 나는 애초에 김모(金某)005) 가 어떠한 사람인지 몰랐다가 형의 말을 인하여 살펴본 것에 불과하다. 형은 그를 가리켜 대간(大奸)이라 하나 나는 그를 의심할 뿐이다. 형의 말을 미루어서 살펴보건대 형적에 의심할 만한 것이 많이 있으나 실로 적확히 나타나지는 않았다. 바야흐로 기염이 성대할 때에 내가 과연 예봉을 꺾을 계획을 시행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한 번 꺾이게 된 뒤에는 평일 불쾌하게 여기던 사람이 떼지어 일어나서 심각하게 공격함에 따라 김효원과 서로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은 서로 돌아보고 기가 죽어서 모두 움츠리고 물러갈 마음을 품었다. 일개 김효원이야 애석해 할 것이 못되지만 사림은 위로하지 아니할 수 없다. 때문에 내가 조제(調劑)하여 중도에 입각하여 사류를 안정시키려 하였던 것이니, 이것이 전후 다름이 있었던 이유인 것이다. 가령 김효원의 권세가 성대하여 장차 폐단을 일으키는 데에 이르렀다면 내가 마땅히 독계(獨啓)하여 배척해야 할 것이고, 김효원이 죄를 진 것이 과중하여 사림이 평안하지 못하다면 내가 마땅히 독계하여 구원해야 할 것이니, 권세를 누르고 위태로움을 구원하는 것은 사리로 보아 당연한 것이다.
근년 이래로 사론(士論)이 한 곳에서 나와 거의 무사하게 되었는데 하루아침에 자중지란이 일어났으니 이것은 김효원의 허물이다. 김효원이 이미 외직으로 나갔으니 고요히 안정되어 무사할 수 있는데 또다시 어지럽게 말을 만들어내어 하는 일마다 서로 의심하여 마침내 조용하지 못하게 한 것은 김효원을 배척하는 사람들의 잘못이다. 사람들의 소견이란 지나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하기가 일쑤이니 어찌하겠는가. 만일 주동(主東)이니 주서(主西)니 하는 설이 없으면 사론이 정해질 것이다. 나는 동서를 깨뜨려서 하나로 만들려 하지만 힘이 미치지 못한다. 가령 내가 동을 주장하기도 하고 서를 주장하기도 한다면 어찌 양쪽이 모두 불쾌하게 여기기에 이르겠는가.’
이때에 정철이 자못 떠도는 말에 의혹되어 처음에는 이이가 동인을 사적으로 두둔한다고 의심하였는데, 이이의 서찰을 보고나서야 비로소 의심을 풀었습니다. 그러나 심의겸의 제배들은 이이를 의심하여 마지않았습니다. 만일 그 뒤에 다시 이이의 심사를 깨닫지 못하였다면 서인이 이이를 치는 것이 반드시 오늘날 동인의 소위에 못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축년006) 무렵에 이르러 서인의 세력이 조금 꺾였는데, 이발(李潑)·김성일(金誠一)이 경석의 계사를 인하여 이수(李銖) 등이 뇌물을 주고 받은 데 대한 옥사를 일으켜 철저히 추문(推問)하였으나 끝내 지적할 만한 실적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발 등은 오히려 옥사가 이루어지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유생 정여충(鄭汝忠)을 형신(刑訊)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발 등의 소위가 여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인심을 열복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발 등의 생각도, 삼윤(三尹)이 일을 그르친 죄007) 를 곧바로 탄핵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하면 선배 사류 중에 반드시 불평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위에서도 모함하는 것인가 의심할까 염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옥사를 인하어 삼윤을 쳐서 제거하려 한 것입니다. 그 거조가 실로 사군자(士君子)의 광명정대한 처사가 아니었으니 인심이 열복하지 않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습니까.이것은 이이만 그르게 여겼을 뿐 아니라 김우옹(金宇顒)도 그르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서인이 여지없이 패하고 동인이 바야흐로 승리하여, 동인이 옳고 서인은 그르다[東是西非]는 것으로 국시(國是)를 정하자, 들떠 조급하고 진출하기를 좋아하는 무리가 앞다투어 부회하였습니다. 그때 심의겸의 집에 출입하며 아침 저녁으로 서로 왕래하면서 종처럼 알랑거리던 무리들이 그들에게 항복하여 몰래 들어간 자가 상당히 많았으나 동인의 주론자(主論者)는 오직 자기에게 붙는 것만 기뻐할 줄 알고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은 미워할 줄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현우(賢愚)와 재능이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아니하고 일체 청관(淸官)과 미직(美職)으로 처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 예로부터 조정 사대부로서 명사(名士)가 된 이는 덕행(德行)이나 재화(才華)로 명사가 되었지 실지가 없으면서도 그 이름을 얻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지금은 인물이 어떠한가는 따지지 아니하고 백이(伯夷)든 도척(盜蹠)이든 입으로 ‘동인이 옳고 서인이 그르다.[東是西非]’는 네 글자만 말하는 자면 명사가 됩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시세를 타고 이익을 노리는 시정인(市井人)들의 행위를 하게 되었으므로 기고만장하게 날뛰어 다시 예의염치라고는 없습니다. 그리고 의논에 조금만 뇌동하지 않는 자에 이르러서는 숙덕(宿德)과 신신(藎臣)008) 이나 염공(廉公)하고 청근(淸謹)한 인사가 있더라도 모두 배척하여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게 합니다. 시론의 괴란됨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니 벼슬길이 어찌 혼탁하지 않겠으며 국가가 어찌 무너지지 않겠습니다. 이러니 이이가 시론을 따르지 않는 것이 어찌 잘못이겠습니까.
기묘년009) 무렵에 이르러 시론이 날로 심각 준엄해져서 시비(是非)의 설이 또 변하여 사정(邪正)으로 되기에 이르러서는 인심이 놀라 분란되고 사론이 크게 무너져 그 형세가 수습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때에 이이가 해주에 있으면서 크게 근심스러운 일로 여겨 소장을 올려 논척(論斥)하고 나서 또 이발에게 글을 보내어 책망하였는데, 그 대략적인 내용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시론이 날로 준엄해져서 다시 화평할 희망이 없다. 생각건대 이 논의는 반드시 그대의 의사가 아닐 것이라 여겼으므로 내 상소문에 이른바 깊은 생각, 원대한 식견이라고 한 것은 바로 그대들 2∼3인을 가리킨 것이다. 지금 그대의 의견도 과격한 논의와 서로 격하게 어울리면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여긴 것이다.’ 하였고, 또 ‘의루(倚樓)가 논핵을 받은 것은 참으로 공론에 의한 것이었으나 방관하는 자는 오히려 조제(調劑)에 해로움이 있다고 의심하였다. 삼윤(三尹)의 탄핵이 잇따라 일어나게 되어서는 인심이 비로소 열복하지 아니하여 현저히 모함하는 것으로 지목하였던 것이다. 다만 연소한 사류가 서로 추종하면서 스스로 하나의 논의를 이루긴 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두려워하고 움츠러들어 감히 지척하여 말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류가 인심이 열복하지 않는 것을 모르고 스스로 공론이라고 믿었을 뿐이다. 내 생각은 이에 그칠 뿐이라고 여겼는데, 이제 또 까닭없이 심의겸은 소인이고 서인은 사당(邪黨)이라고 현저히 지척하게 되어서는, 가면 갈수록 더욱 심각해졌으니 참으로 사람을 잡는 수단이다.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심의겸은 애석히 여길 것이 없더라도 서인이 모두 애석하게 여길 것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겠는가. 이것이 과연 그대들의 본의인가. 만일 본의였다면 나의 강론한 것은 모두 면종(面從)한 것이니, 미안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는데 이른바 의루(倚樓)란 조원(趙瑗)입니다.
또 ‘후손에게 넉넉함을 전해준다[裕後]고 운운한 말은 다만 심의겸이 권세를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 것뿐이지, 그를 금고(禁錮)하여 서용하지 않아야 된다고 말한 것이 아니니, 상소를 자세히 살펴보지 못한 것이 아닌가. 내 상소는 사류를 보전하고 조정을 편안히 하려 하였을 뿐이고 본래 소요스럽게 하려는 계책이 아니었는데, 일방적인 의견을 가진 자들이 자기를 칠까 두려워하였으므로 스스로 소요스러운 일을 만들어냈으니 나 또한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또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도 남을 꾸짖는 데에는 밝고 비록 총명이 있으나 자기를 헤아림에는 어두운 것이다. 연전에 계함(季涵)010) 이 서인을 주장하는 의견을 편벽되이 고집하여 도리어 나를 의심하였는데, 나와 그대가 좋은 말로 입이 닳도록 타일러 힘껏 만회하였다. 이때 그대가 계함을 어떠한 사람이라고 여겼는가. 오늘날 그대가 동인을 주장하는 것도 또한 계함이 서인을 주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어찌하여 계함을 꾸짖던 것으로써 스스로를 꾸짖지 아니하는가. 을해년011)서인의 과실은 거조가 온당함을 잃은 데에 있었는데, 오늘날 시배(時輩)의 거조가 과연 을해년 보다 나은 것인가. 서인을 사당(邪黨)이라고 다 지척하는 것이 을해년에 공저(公著)012) 하나만을 논핵한 것과 견주어 어떠한가. 서인의 현자(賢者)는 모두 청관(淸官)에 의망(擬望)하지 않는 것이 을해년에 중숙(重淑)013) 만을 전랑(銓郞)에 승천(陞薦)시키지 않은 것과 견주어 어떠한가. 을해년에 의루(倚樓)가 상을 받은 것은 참으로 여러 사람의 마음에 만족하지 못한 것이었지만, 오늘날 시세에 빌붙어서 팔을 내두르고 큰소리치며 스스로 득지(得志)함을 밝히는 자가 또 몇 사람의 의루인지 모르지 않는가. 인심이 의구하고 유식한 자가 우탄(憂歎)하는 것이 을해년보다 심한데 바야흐로 시끄럽게 사람을 향해 쟁변하기를 동인이 옳고 서인이 그르다 하니, 이 말은 다만 동류들 가운데 진취(進取)를 추구하는 자들만 믿을 뿐 다른 사람이야 누가 믿겠는가.
만일 오늘날의 처사가 중도에 맞는다면 누가 「동인이 옳고 서인이 그르다.」고 하지 않겠는가.지금 이미 그 잘못을 본받고서 또 스스로 옳다 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무턱대고 행동하고 시행이 전도되어도 군자가 되는 데에 상관이 없단 말인가. 오늘날 선비를 뽑음에 있어 인물의 본품이 어떠한가는 묻지 않고 다만 논의의 이동(異同)으로 취사(取捨)를 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논의가 백출하여 괴귀(恠鬼)가 난무하고 있다. 저들이 어찌 의루가 상을 받는 것을 보고 이것이 좋은 벼슬을 취득하려는 것임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경함(景涵)014) 은 고금의 사적을 두루 보았으니, 어찌 군자가 뜻을 얻고 청론이 바야흐로 행해지는데도 국사를 무너뜨리고 농락함이 오늘날과 같은 경우가 있었는가. 조정의 사대부가 식견이 분명하지 못하여 어진 사람이 있어도 일을 완성시킬 수가 없다. 허노재(許魯齋)가 「인자 예양(仁慈禮讓)하고 효제 충신(孝悌忠信)하고서도 나라를 망치고 집을 무너뜨린다는 경우가 이것이다.」 하였는데, 내가 일찍이 지나친 말이라고 여겼더니 지금 비로소 징험이 된다. 옛 사람의 말은 가벼이 여길 수 없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계함은정철의 자입니다.
또 ‘화평과 배척을 아울러 행할 수 없는 것은 웃음과 울음을 아울러 낼 수 없는 것과 같다. 내 논의는 화평을 주로 삼았고 헌부의 상소는 배척을 주로 삼았으니, 이것이 옳으면 저것이 그르다. 지금 그대들의 소견은 이미 배척을 공론으로 삼으면서 또 화평하고자 하니, 진퇴에 근거할 바가 없어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만일 흉중이 명백하고 맑다면 이런 분명치 못한 식견과 의논이 어디로부터 나오겠는가. 만일 화평하게 한다면 심의겸과 김효원의 구구한 논변이 어떻게 하면 크게 상관될 것이 있겠는가. 내버려두고 묻지 말고서 다만 그 우열에 따라 취사하면 된다. 배척하고자 한다면 또한 그 죄를 분명하게 바루어야 할 것인데 무슨 까닭으로 입으로는 화평을 말하면서 마음으로는 배척을 주장한단 말인가. 이는 목을 조르고 뺨을 때리면서 그와 서로 좋게 지내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어찌 명분이 바르고 말이 사리에 맞아서 일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일은 백방으로 생각해 보아도 끝내 선후책(善後策)이 없다. 이는 실로 하늘이 하는 일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경함(景涵)은 평일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여 어떠한 사업을 하려 하였는가. 그런데 오늘날 조정에 벼슬하면서 기관(機關)을 다 동원하여 동인을 부호하고 서인을 억제하는 일만을 성취할 뿐이란 말인가. 유자(儒者)가 도를 행함이 과연 이것뿐이란 말인가. 오늘날 만일 죽음 속에서 삶을 구하려 한다면 마땅히 논의를 정립하기를 「심의겸에게 드러난 허물은 없으나 이미 외척이고 또 사류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으니, 이는 마땅히 작록만 보존시킬 뿐 다시 요지에 두어서는 안 된다. 삼윤(三尹)은 스스로 부정(不靖)한 일을 일으켜 사류에게 크게 거스름을 받았으니 이들 또한 다시 청선(淸選)에 참여시켜서는 안 된다.」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나머지 서인들은 재능에 따라 벼슬을 주고 조금도 시기하거나 저해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또 동인으로서 의논이 과격한 사람은 제재하여 억누르고 때를 타고 부회하는 자는 물리쳐서 소외시켜야 한다. 이처럼 마음가짐이 공명(公明)하여 세월이 오래되면 좋은 소식이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이 일을 해나갈 사람이 없을까 염려될 뿐이다.’ 하였습니다.
또 ‘그대와 이현(而見)015) 으로 말하면 처사가 중도를 잃어 이미 범과 무소가 우리를 뛰어나가게 한 책임을 면할 수 없으니, 모쪼록 이현을 힘써 만류하여 시사(時事)를 수습하는 한편 우리들로 하여금 재[嶺]를 넘어 귀양가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도 또한 한 방도이다. 다만 시론(時論)이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대들도 장차 제사지낸 뒤의 추구(芻狗)016) 가 되어 스스로 입각(立脚)할 수 없게 될까 염려된다. 아, 괴롭기 그지없다. 우리가 다투는 것은 의리일 뿐이다. 나는 실로 일호도 사정에 치우치고 화를 낼 마음이 없다. 다만 내 천성이 이완(弛緩)된 것은 무심(無心)에 근본한 것이다. 그러나 사리가 바르면 가령 철륜(鐵輪)이 머리 위에 구르더라도 조금도 꺾이지 않는데, 하물며 온 세상이 더럽게 헐뜯는 것이 어찌 나를 일호인들 동요시킬 수 있겠는가. 사리가 바르지 못하면 삼척동자가 머리에 진흙칠을 하고 가시를 지게 하더라도 마음에 달게 여겨 사양하지 않겠다. 그대는 모쪼록 숙부(肅夫)와 더불어 사리에 의거 상량하여 잘못된 것을 지시해 줌으로써 나로 하여금 환하게 스스로 깨닫게 해주기 바란다. 사리가 바르지 못하면 내가 소견을 곧 고치겠거니와, 만일 내 소견이 사리에 어긋나지 않았다면 또한 돌이켜 생각하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이발·유성룡·김우옹의 무리들이 모두 죽음 속에서 살기를 구하라[死中求生]는 말을 불변의 정론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때 김우옹이 이이에게 답한 서찰에서 또한 ‘이 논의가 매우 좋다.내 의견도 바로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여긴다. 내 의견이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경함(景涵)과이현(而見)의 의견도 그러하니, 어찌 큰소리로 배척하는 자와 하나가 될 수 있는가. 다만 중론에 격렬한 것이 많고 벗들의 힘이 미치지 못한 점이 있어서 그러할 뿐이다. 간절히 바라건대, 서로 잇따라 상량하여 선후책을 도모하는 것이 매우 다행한 일이겠다.’ 하였습니다.
또 ‘당초 심의겸과 김효원이 흔단을 맺은 데 대한 시비는 본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 사이에 어찌 진짜 시비가 없겠는가. 을해년017) 서인이 괴패(壞敗)된 짓을 한 것에 이르러서는 시비가 어찌 분명하지 않은가. 다만 지금 동인이 격분으로 인하여 노기가 가중되어 지적하여 비의(比擬)함이 과당하였던 탓으로 사류가 분열하여 수습할 수 없게 된 데 이르러서는 또 스스로 옳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고, 또 ‘시비가 있기는 하였으나 사정(邪正)과 흑백의 다름에는 이르지 않았으니,배척하는 것은 불가하고 다만 화평해야 할 뿐이다. 지금은 단지 삼윤(三尹)을 그르다고 해야 할 것이고 그 나머지 서인을 아울러 연루시켜 그르다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 계함(季涵)·중회(重晦)018) 같은 사람을 청반(淸班)에 의망(擬望)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온당하지 못하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스스로 과실이 있음을 면치 못하였으니, 동인의 과실만은 아니다. 그러나 어찌 끝내 배척하고 쓰지 않으려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또 ‘심의겸을 지척하여 소인이라 하고 서인을 지척하여 사당(邪黨)이라 하였는데 이 말은 과연 잘못되었다. 또 보내온 사연에 「오늘날 선비를 취함에 있어 인물의 본품은 묻지 않고 다만 의논의 동이(同異)로써 취사(取捨)하므로 괴귀(怪鬼)가 난무한다…….」 하였는데, 이야말로 그와 같다.나도 금일의 사세를 보건대, 장차 인심이 불평하게 되어 패증(敗證)이 백출하고 있으므로 매양 동배(同輩)를 위해 힘써 말하였으나 다만 붕우 사이에 또한 역량과 규모가 세도(世道)의 책임을 담당할 수 있는 자가 있음을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사람마다 각자 견해를 달리하여 서로 통하지 못하니 마침내는 어떻게 귀결될지 모르겠다.’ 하였습니다.
또 ‘귀하의 상소에 「외척은 반드시 재앙의 실마리를 만들게 되는 것이니 중용(重用)해서는 안 된다.」 한 것은 또한 사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전일 상소의 뜻을 자세히 보지 못하여 심의겸을 위해 변명하는 병통이 있지 않은가 여겼었는데 지금 보여 준 뜻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러하지 아니하였다. 전일의 망령된 논의가 매우 부끄럽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계함(季涵)은 정철의 자(字)이고 중회(重晦)는 김계휘(金繼輝)의 자입니다. 김우옹의 견해가 이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발이 이이에게 답한 서찰에도 ‘이 논의가 매우 좋다. 이야말로 오늘날의 사세에 매우 마땅하게 맞는 말이다. 내 의견은 본래 이와 같았다. 내 의견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숙부(肅夫)의 의견도 이와 같았다. 고명(高明)은 평일 제배(儕輩)들의 소견이 이와 같다고 여기지 않았는가. 제배들이 당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와 같았다. 다만 그 상소의 중간에 「피차(彼此)의 사류(士類)가 심히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러 차례 뜻밖의 근심거리를 야기시키므로 바야흐로 힘을 다해 조호(調護)하고 있지만 힘이 부족할 뿐이다.」 하였다. 존좌(尊座)는 먼 지방에 있으면서 오직 의심할 만한 형적에만 의거하고 오직 놀랄 만한 말만을 듣고 오직 물이 배어 들어가듯 헐뜯는 참소만 받았을 뿐이었으니 어떻게 제배들의 심사를 다 알 수 있겠는가.고명의 덕의(德義)는 곧 내가 평생에 경신(敬信)하는 바로 믿고 의지하려 하였는데, 지금 서로 알아줌을 받지 못하고 이처럼 사이가 소원하게 되었으니 오히려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또 ‘대개 서인의 인품을 논하자면 취사(取捨)할 바가 없지는 않으나, 지금 현우(賢愚)를 묻지 않고 일체로 그르게 여긴다면 진실로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사이에 물의가 있는 자는 우선 공론의 허락을 기다리고 그 나머지 제공(諸公)들은 실로 의심할 것이 없다.’ 하고, 또 ‘서인 쪽 사류를 혹 삼사(三司)에 의망(擬望)하지 않은 경우가 있었던 것은 그에게 실로 잘못이 있어서였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 막고 틔어주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었고 진실로 장차 주선하여 수습하려 했던 것인데 영원히 버리고 쓰지 않는 것으로 의심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였습니다. 또 ‘심의겸을 지목하여 소인이라 하고 서인을 지목하여 사당(邪黨)이라 한 이것이 과연 내 소견이겠는가. 내 의견으로는 심의겸·김효원은 시비(是非)가 없지는 않으나 심의겸 또한 대단한 죄를 얻은 일이 없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다만 시비를 가지고 말하였을 뿐이고 갑자기 현저한 배척을 가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의겸을 대우함이 이러하다면 그밖의 사류를 수습하고자 한 것을 알 수 있다.’ 하고, 또‘시비를 가지고 말하였으나 그밖의 사류는 절로 관여된 바가 없다. 또 그르게 여기는 자도 일개 심의겸일 뿐이고 또한 너무 심하게 공격하는 논의도 없었다.’ 하였습니다.
또 ‘정희적(鄭熙績)이 흐리멍덩하고 무식하여 소요를 일으켜 심의겸을 소인이라 하기에 이르렀고, 또 재앙을 꾸민다느니 사설(邪說)이라느니 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지나친 말이다. 그러나 제배들은 참여해 안 자가 없었다.’ 하고, 또 ‘의루(倚樓)019) 가 상을 받은 것은 진실로 여러 사람의 마음에 흡족하지 못하였지만 지금 시세에 따라 부화하는 자도 많이 있었으니 이 또한 형세상 그렇게 된 것이다. 이것이 어찌 제배의 죄이겠는가.’ 하고, 또 ‘천하의 일이 여의치 않은 것이 이와 같다. 만일 제군(諸君)이 우리 제배 몇 사람의 소견에 의해 일을 하였다면, 거의 중도에 맞게 처리하여 다시 오늘날 존공(尊公)의 의심을 초래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을해년 무렵에 존공이 시사가 날로 잘못되어감을 직접 보고서도 한 번 손을 들어 구원하지 못하고 오직 몸을 거두어 떠나갔을 뿐이니, 존공의 덕망과 역량으로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내가 한 세상 사람을 거느리고서 모두 내 의사처럼 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또 ‘심의겸을 중용할 수 없다고 한 것은 그를 금고(禁錮)시켜 서용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고 운운하였는데, 이것은 내가 혼망하여 잘못 상소의 뜻을 자세히 살피지 못한 잘못이다. 어구(語句)를 만듦에 있어 어긋남이 이와 같으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공의 말에 소견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 또한 쇠세(衰世)의 염려이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이현(而見)이란 유성룡의 자이고 숙부(肅夫)란 김우옹(金宇顒)의 자이고 경함(景涵)이란이발(李潑)의 자입니다. 이 무리들이 논한 바는 이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정희적이 사헌부의 상소를 지으면서 심의겸을 지목하여 처음으로 소인이라고 하고 서인을 지목하여 처음으로 사당(邪黨)이라 하였을 때, 이발·김우옹 등이 옥당에 있으면서 사헌부의 상소가 과당하다 하여 차자로 논박하였습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들뜨고 조급한 자를 억제하고 사류를 보합하여 함께 국사를 하고자 한 것은 실로 사류 공공(公共)의 논의요 실로 한 사람의 사견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발 등이 이이의 말이 옳은 줄을 알았으나 본래 편파적인 소견으로 뭇사람이 지껄이는 가운데 시달림을 받아서 머리를 내밀었다 감추었다 하면서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이의 말을 쓰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이이가 서인을 사적으로 두호하는 의사가 있는 것으로 의심하였습니다.
이이가 또 이발에게 서한을 보내어 깨우쳐 주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형의 의논은 그 마음을 의논하는 것이고 나의 논의는 그 형적(形迹)을 논하는 것이다. 사람을 관찰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마음으로 해야 하고 상벌은 마땅히 형적으로 해야 한다. 만일 그 형적을 논하지 않고 마음으로 상벌을 내리면 인심을 열복시킬 수 없다. 이것이 요(堯) 임금이 사흉(四兇)을 죽이지 아니한 이유020) 이다.
지금 심의겸의 마음을 형이 깊이 간파하였으며 나도 감히 그 근심이 없다고 보장할 수 없으니 버린들 뭐 아까울 것이 있겠는가. 다만 형적에 현저한 죄과가 없는데도 갑자기 공격을 가하고 서인 쪽의 선사(善士)를 연루시켜 아낌없이 버린다면 추존하여 권력을 잡은 사람이 모두 유속(流俗)의 비루한 사람들로 대다수가 심의겸 쪽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거조가 이와 같을 경우 인심이 어찌 열복하겠으며 나라의 언론이 어찌 정해질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깊이 근심하는 이유이다. 심의겸·김효원 두 사람의 시비에 대한 논변은 치란(治亂)에 관계가 없는데 도리어 시비에 대한 논변 때문에 인재를 파괴하고 국맥(國脈)을 손상하되 온 세상이 도도하여 그런 줄을 깨닫지 못하니, 이는 참으로 아이들의 소견이다.
을해년021) 사이에 서인이 팔을 내두르면서 「시비는 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였다. 내가 매우 가소롭게 여기기만 하고 놀라며 탄식하기에 이르지 아니한 것은, 서인에 착한 선비가 있기는 하나 학문하는 선비가 아니니 깊이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되었던 것이며, 또 사암(思庵)·중회(重晦) 같은 무리도 모두 나와 같이 넌지시 비웃었으므로 놀라고 탄식하기에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지난해 시비의 논변에 대해서는 학식이 현형(賢兄)과 같은 자도 눈을 부릅뜨고 기염을 토하면서 기필코 논변하고자 하였으니 내가 실망하였다. 어찌 깊이 슬퍼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내 의견으로는 심·김 두 사람에게 시비가 있기는 하나 그 논변은 국가에 관계되지 않는 것인데도 논변하여 도리어 소요스럽게 하였으니, 논변하지 말고 사류를 조제(調劑)하여 악을 물리치고 선을 드러내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되느니만 못하였다고 여긴다. 그런데 지금은 묽게 검은 것은 논변하여 제거하고 몹시 검은 것은 취하여 쓰니 이는 어떠한 의리이며 식견인가. 옛날에 제 경공(齊景公)이 공자(孔子)를 쓰고자 할 적에 안평중(晏平仲)이 이를 말렸지만022) 이는 안평중이 성인을 미워한 것이 아니다. 그저 소견이 밝지 못하였던 것이다. 평중은 성인을 몰라보았는데도 오히려 현대부(賢大夫)의 이름을 잃지 않았으니, 오늘날 인백(仁伯)023) 을 모르는 자를 어찌 반드시 모두 버려야 될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유속(流俗)의 연로한 재상이 전일에는 서인에게 뜻을 얻지 못하였는데 오늘날 뜻을 얻고나서는 바야흐로 동인에게 충성을 바치고자 하니, 조제를 그르게 여기는 것이 이치나 형세로 보아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변하기 쉬운 자들이니, 때가 바뀌고 세력이 떠나가면 또 동인을 배척하게 될 텐데 믿을 만한 것이 뭐가 있는가. 또 각립(角立)에 관한 말은, 형은 내가 심의겸·삼윤(三尹)과 함께 사림을 해치는 것으로 의심하니 형이 나를 보는 것이 너무 박한 것이나 아닌가. 내가 전부터 고립하여 서인에게도 신임을 얻지 못하고 또 동인에게도 신임을 얻지 못한 것은 진실로 양쪽을 조화하여 조정을 편안하게 하려 한 때문인 것이다. 만일 서인에게 붙어서 동인을 공격하게 한다면 차라리 동인에게 붙어서 서인을 공격할 것이다. 후일 심의겸·삼윤에게 편당하여 맑은 명성을 잃고 좋은 벼슬을 얻기보다는 오늘날 현형(賢兄)에게 붙어서 맑은 명성과 좋은 벼슬 두 가지를 함께 얻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이른바 사암(思庵)은 박순(朴淳)의 별호이고 인백(仁伯)은 김효원(金孝元)의 자(字)입니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형은 내가 형에게만 권면하고 서인은 경계하지 않는다고 의심하지만 내가 형에게 고한 말을 서인이 듣지 못하였으니, 서인을 경계한 말을 형이 어찌 들을 수 있는가.
대체로 남의 싸움을 말리는 데에는 이길 자를 말려야 한다. 이기지 못할 자는 바야흐로 싸움을 그만두기를 원하는 법이니 어찌 듣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을해년에 서인이 조금 이겼고 동인이 조금 패하였으므로 그때에 나는 그저 서인을 향해 쟁변하였으니 어찌 동인을 권면하는 말이 있었겠는가. 지금은 서인이 여지없이 패하고 동인이 바야흐로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어찌 동인을 향해 쟁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서인도 잘못 헤아린 것이 많으므로 수시로 경계하여 일러주었더니, 믿고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심모(沈某)024) 까지도 「사류가 만일 나와 삼윤(三尹)을 배척하고 그 나머지 서인 쪽 선류(善類)를 모두 구애없이 통용(通用)하면 인심이 반드시 열복할 것이다.」 하였다. 심의겸의 말도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하물며 다른 사람의 말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오늘날 조제의 책임은 동인에게 있다. 후일에 번복되는 경우에 대해서는 또한 어찌 미리 헤아릴 수 있겠는가. 대저 군자의 도리는 차라리 남이 나를 저버리게 할지언정 내가 남을 저버리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번복할 것을 미리 헤아려서 먼저 거조를 잘못하는 것은 이미 옳지 않다. 사변은 무궁한 것이니 계손(季孫)의 근심이 전유(顓臾)에 있지 않고 담 안에 있을 줄 어찌 알겠는가.025) ’
이이의 이 서간의 말은 분명하고도 통쾌하여, 어리석은 남녀들이라도 공을 위하고 사를 잊은 채 일심으로 나라를 위해 몸바칠 충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발 등이 기뻐하면서도 계속 잘하려고 하지 않고 허물 고치기를 꺼렸으니, 어찌 사의(私意)에 굳게 가려진 것이 극심한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이가 동·서를 타파하자는 논의를 주창한 뒤로부터 신진으로서 부회하는 무리들은 기탄함이 더욱 심하였으나 틈을 타지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계미년026) 사이에 이이가 시배의 과격한 잘못을 극력 진달하여 ‘바라건대, 전하는 대신(大臣)·대간(臺諫)·시종(侍從)을 널리 불러 탑전에서 면대하여 성상의 뜻을 밝게 효유함으로써 동·서를 분변하는 버릇을 고치고, 선한 사람은 등용하고 나쁜 사람은 벌주는 것을 일체 공도(公道)를 따르고, 융화시켜 탕평책을 써서 진정하고 조화하게 하소서. 만일 미혹됨을 고집하고 깨닫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이를 억제하고 사정을 품고 억지로 논변하는 자가 있으면 이를 배척하여, 반드시 모두가 같이 인정하는 대로 공적으로 옳은 것과 공적으로 그른 것을 한때의 공론이 되게 하면 사림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시배가 이이를 축출하려고 모의한 것이 이 소장에서 처음 싹텄습니다. 그러나 이 소장의 말은 곧 전일 동인을 깨우쳐 주던 말로서, 이발의 무리가 지당한 논의라고 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발의 무리들이 전일에는 노하지 않다가 오늘날에 와서 노하는 것은 주상께서 바야흐로 이이를 의지하고 있으므로 그 말이 드디어 행해져서 자기들이 그의 억제를 받을까 심히 두려워한 때문입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전일에 이른바 지당하다고 한 것도 또한 겉으로 복종한 체한 말이고 마음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 것임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붕우간에 성실히 대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아, 가령 서인이 주장하는 논의가 또 편중되어 모든 동인을 사당(邪黨)으로 배척한다면, 이이가 부지시키는 것이 서인에게 있지 아니하고 반드시 동인에게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이의 본심입니다. 을해년에 김효원의 제배를 구원한 한 가지 일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로써 살펴보면,전후의 형적은 같지 않지만 피차가 없이 지공무사한 마음으로 해명한 것입니다.
아, 처음 두 사람을 외직으로 내보낼 계책을 세워 당론을 없애려 한 사람도 이이이고 을해년에 서인에게 거스름을 당한 사람도 이이이고 을해년 이후 동인에게 배척을 당한 사람도 이이입니다. 이 어찌 온 조정에 한 사람도 공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없어 사류가 산산이 무너지고 나라 일이 날로 글러지기 때문에, 자신이 그 책임을 담당하고 나서서 힘껏 쟁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자신을 위해 계교한 것이겠습니까. 곧 사류를 위한 계책이요 국가를 위한 계책입니다.
가령 이이가 때로는 동인을 주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인을 주장하기도 하여 시론(時論)에 거스름이 없었다면, 이이는 한쪽 사람이 되는 데에 불과하였을 것입니다. 국가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한쪽 사람이 되는 것이 어찌 이이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이것이 이이가 전부터 고립하여 서인에게도 신임을 얻지 못하고 동인에게도 신임을 얻지 못한 까닭이니, 어찌 시론에 이견을 세우기를 좋아한 것이겠습니까. 진실로 조그마한 한 나라에 인재가 적은데, 다시 피차를 구분하여 한쪽을 버리고 한쪽만을 취한다면 현인을 막고 인재를 버리게 되어 장차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아, 동서의 당파가 나뉜 뒤로부터 사람마다 각기 사심을 품어 자기편 사람은 편들고 반대편 사람은 공격하여, 조정에 공론이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 추천하여 끌어들이는 것은 서인 가운데 재행(才行)이 있는 사람이고 동인은 엄폐시켜 버리며, 헐뜯고 비방하는 것은 동인의 허물과 악행이고 서인에 대해서는 숨겨버렸습니다. 그러다가 동인이 뜻을 얻게 되어서는 역시 서인을 본받았는데 그보다 또 더 심했습니다. 이러므로 공론이 항상 아래에서 답답하여도 위에 진달할 길이 없고, 조정의 진퇴 용사(進退用捨)와 상벌 출척(賞罰黜陟)을 일체 동·서인이 하는 대로 맡긴 채 위에서는 그 사이에 손을 대지 못하였습니다. 10여 년 이래로 동서의 당이 이미 이루어져서 배반하고 나가는 자는 종 취급하고 들어오는 자는 주인 대접을 하였으므로 구신(具臣)027) 이 자리만 채우고 앉아서 서로 도와 잘못을 숨겨주었습니다. 따라서 간혹 근후하고 선량한 사람이 있어도 나라를 집처럼 걱정하고 충성을 다해 임금을 섬기면서 입장(立仗) 아래에서 한 번 우는 자028) 가 있음을 듣지 못하였고 그저 묵묵히 시속에 따라 부침(浮沈)하면서 녹이나 탐하고 몸을 보전하여 해마다 승진 제수되어 경상(卿相)의 자리를 차지할 뿐이었습니다. 아, 이이 한 사람이 아니었으면 군신의 의리가 거의 폐기될 뻔하였으며, 일국의 공론을 위에서 어떻게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이이가 죽은 뒤에도 감히 이런 말로써 전하의 옆에서 아뢰는 자가 없게 된 까닭입니다.
아, 기묘년029) 소장을 올린 뒤로 동인이라 이름하는 사람들은 이이가 자기들을 모함하는 것이라 하여 더욱 힘껏 공격하였고, 서인이라 이름하는 사람은 또한 이이가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라 하여 더욱 깊이 추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들은 모두 이이의 본심을 모른 사람들로 여겨집니다. 만일 동인이 이이의 본심을 깊이 알아 이이의 이 소장을 인하여 처사가 중도를 얻어 공론에 부응되었다면 명절(名節)이 보전될 수 있었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국사의 궤열(潰裂)도 어찌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겠습니까. 그 중에는 사군자(士君子)의 의사를 지닌 자가 한두 명쯤 없지 않았으나 멀리 앞을 내다보는 식견이 없어 편견을 주장하고 있었으므로 과격함을 억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숭상 조장하여 계미년의 분쟁을 일으켰으니, 이에 이르러 동인이 국사를 허물어뜨리고 농락한 것이 도리어 을해년 서인의 소행보다 심함이 있었습니다. 그때 삼사의 사람 가운데 권덕여(權德輿)와 같이 나약하여 위협에 따른 사람이 한둘쯤 없지는 않았으나, 그 나머지는 대다수가 때를 타고 시기하는 무리들로 본래 이른바 사류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김우옹의 소장에 ‘들뜨고 조급한 자들을 억제하여 사류를 보전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말하였고, 이발이 피혐하는 계사에서도 이 무리들을 사류라 하지 않았으니, 공론은 엄폐할 수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무리들이 당초에 어찌 갑자기 이러한 거조를 하려 하였겠습니까. 다만 대각(臺閣)에 중망을 지고 사람들을 진정시킬 수 있는 인물이 없음으로 인하여 마음대로 농간질을 하였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른 것입니다. 계락과 술책이 다하고 손발이 다 드러나서 수습할 수 없게 되어서는 전적으로 이해(利害)에만 마음을 기울이고 명의(名義)는 돌아보지 않은 채 오직 필승할 것만을 계획하여 근거없는 사실을 날조함에 있어 못하는 짓이 없이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왕안석(王安石)에 견주었고 왕안석에 견주어도 인심을 열복시키기에 부족하게 되어서 또 ‘오만하게 천단하였다.’는 것으로 지목하였고, ‘오만하게 천단하였다.’는 것으로 더욱 성청(聖聽)을 현혹시킬 수 없게 되어서는 ‘나라를 그르쳤다.’는 죄로 논하였고, ‘나라를 그르쳤다.’는 죄명에 또한 근거할 데가 없게 된 뒤에는 아무리 이이의 말 속에서 꼬투리를 찾으려 해도 되지 않자 ‘성상께서 몹시 미워하는 사람은 심의겸이고 사론이 함께 싫어하는 것은 외척이니 만일 심의겸을 함정에 빠뜨리면 위로는 성청을 현란시킬 수 있고 아래로 사람들의 입을 겸제(箝制)할 수 있다.’고 여겼으니, 먹은 마음이 아, 너무도 참혹합니다.
그러나 시배(時輩)가 미워하는 것이 어찌 반드시 심의겸 한 사람에게 있었겠습니까. 이이의 경학(經學)과 덕망이 한 시대 사림의 영수가 되었고 또 화평의 논의를 주장하였으므로 시세에 빌붙은 무리가 하루아침에 화평의 논의가 행해져 자기의 이익을 잃어버리게 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불평스러운 마음을 품고 그를 미워한 것입니다. 그리고 말년에 이이가 성상의 은총을 크게 입어 날로 의지가 깊어지게 되어서는 시세에 빌붙은 무리들이 머리를 모으고 크게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제거할 방법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이는 행의(行義)가 본디 고상하여 또 다른 일로 오욕을 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이가 심의겸과 약간 족분(族分)이 있는 것을 인연하여 이를 끌어대어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때 이른바 명사(名士)란 자로 실제 심의겸에게 빌붙었던 사람 가운데 모두가 함께 아는 사람이 많이 있었는데도, 시배가 일찍이 그들을 비난하는 말은 한 마디도 없이 도리어 그들을 대각(臺閣)에 앉혀놓고 뻔뻔스러운 얼굴로 입을 싹 닦고, 심의겸을 탐탁치 않게 보는 이이를 공격하게 했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은 아둔하여 참으로 그것이 무슨 마음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시배가 참으로 심의겸을 미워해야 된다는 것을 알아서 공격한다면 어찌 심의겸에게 빌붙은 사람은 공격하지 아니하고 곧 심의겸을 탐탁치 않게 보는 이이를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시배가 미워한 것은 실로 심의겸에게 있지 않고 이이에게 있었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아,이 마음은 환하여 길 가는 사람도 아는 것인데 어떻게 구구하게 한 손으로 천하의 눈을 가릴 수가 있겠습니까.
성혼을 논하는 말에 이르러서는 ‘산야(山野)에 몸을 의탁하여 조정의 정령(政令)과 인물의 진퇴(進退)를 참여해 알지 않은 것이 없고, 들뜨고 경박한 무리를 모아 시사를 평론하고 경상(卿相)을 두루 헐뜯으며 한 세상의 사람을 하찮게 보아 유속(流俗)으로 지목한다.’ 하였는데, 이는 실로 기묘년에 남곤(南袞)의 무리가 사림을 일망타진하던 때030) 쓰던 말입니다. 아, 이 말이 어찌 사군자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현인을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한 죄와 사특하고 편벽된 말이란 것이 이에 이르러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전일 동인으로 이름한 자라 할지라도 진실로 그때 삼사의 자제나 당여(黨與)가 아니면 팔을 걷어붙이고 격분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이것이 조야(朝野)의 공론이 일시에 사방에서 폭발하여 곧은 말이 조정에 가득하게 되어 위세로 협박할 수 없었던 이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때의 삼사는 공론에 죄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성명께도 배척을 당한 것입니다.따라서 이이가 다시 들어온 뒤로는 형적이 일변되어 모든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고 있는 상황인데도 동인은 도리어 모두 그런 식으로만 사의(私意)로 사람을 헤아렸습니다. 그리하여 하나의 거조가 있게 되면 곧 의혹을 제기하였으나 이이는 혐의를 피하지 아니하고 공론을 크게 펼쳤습니다. 공론이 쓸 만한 현재(賢才)라 하면 동서를 따지지 않고 천거하여 기용하였고 공론에 빌붙는 경망한 자라 하면 동서를 따지지 않고 제재하여 억눌렀으며, 조금이라도 명의(名義)를 알아서 전적으로 아름답지 못한 태도를 지닌 사람만 아니면 이론(異論)이라 하여 배척하지 아니하고 모두 수습하여 기용했는데, 하물며 이른바 사류에 대해서이겠습니까. 지론(持論)의 지공무사함이 이와 같은데 저들이 먼저 스스로 의혹하는 마음을 품고 잠깐 나왔다가는 곧 숨어버리는가 하면 물러나서 사태의 변천을 관망하면서 유감과 원한을 풀고서 함께 국사를 할 계책을 하려 하지 않았으니,아, 또한 잘못되었습니다. 저들이 이미 이와 같아서 그때 성명께 죄를 얻어 배척당하기도 하고 외방으로 좌천되어 나가기도 한 수효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한 시대의 인재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고 보면 당시 청망(淸望)에 주의(注擬)된 자로서 한두 명은 명망이 드러나지 않은 자가 있기는 하였으나 시배가 국사를 무너뜨려 농락한 것에 비하면 또한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정철의 무리에 이르러서는, 이이가 그 단점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으나 인물로 말하면 전일 재능도 없고 덕행도 없으면서 시론에 빌붙은 자에게 비하면 하늘과 땅처럼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이가 매양 시배가 실정에 지나치게 정철을 공격하여 간사한 사람으로 지목하는 것을 보고는, 홀로 그렇지 아니함을 밝히기를 ‘정철은 충청 강개(忠淸剛介)하여 국사에 마음을 다하였다.편협한 결점이 있기는 하나 단점이 그의 장점을 엄폐할 수는 없다. 심의겸과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고는 하더라도 의겸이 뜻을 얻었던 때에는 조금도 아첨하여 가까이한 형적이 없었으니 기질과 심사가 그와는 아주 달랐던 것이다. 다만 악을 미워함이 너무 심하여 남을 용납하지 못하였고 남과 합치되는 의견이 적고 중의(衆議)를 구차히 따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인 쪽 사류가정철의 심사를 모르고서 형적만을 가지고 의심한 것이다. 인재가 아까우니 쓰지 않을 수 없다.’하면서 시배에게 극력 말하였습니다. 이 또한 국가를 위한 계책인 것입니다. 이이가 어찌 하나의정철에게 사정을 두고서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이이가 신사년031) 의 계사에서 ‘정철이 중도에 맞는 사리를 헤아리지 않고 사류의 과격함을 의심해서 마음을 비워 돌이켜 반성하여 원망하는 것이 없지는 못했다.’ 하였으니, 이이가 정철에게도 좋아하는 바에 편중하여 전연 그의 병통을 모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발이 이이에게 답한 서한에 또한 ‘김계휘(金繼輝)·정철 같은 사람은 격론을 일으킨 과실이 없지는 않으나 오늘날 등용한 무리에 비하면 훨씬 차이가 있다…….’ 하였고, 김우옹도 ‘정철은 끝내 버릴 수 없다…….’ 하였습니다. 이들의 의논도 오히려 이러하였다면, 이이가 정철을 기용하려 한 것은 모두 공론에 의거한 것이니 또한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삼윤(三尹)에 이르러서는 이이가 ‘이들이 일찍이 을해년032) 에 일을 그르쳤다.’고 여겼기 때문에이이가 전형(銓衡)의 권한을 잡고 있을 때에는 청요직(淸要職)에 한 번도 주의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때 어떤 문생이 이이를 찾아가니, 이이가 묻기를 ‘지난번 내가 윤두수(尹斗壽)를 형조 참판에 주의한 것에 대해 외부의 의논이 어떻다고 하던가.’ 하자, 대답하기를 ‘외부의 의논을 잘 알지 못하겠으나 이들이 일찍이 을해년에 일을 그르쳤던 탓으로 오랫동안 배척당하여 폐기되어 있었으니, 지금 이 관직을 제수하는 것은 물정이 반드시 온당하지 못하게 여길 것이다.’ 하므로, 이이가‘이것은 시배의 논리이다. 일을 그르친 죄에도 경중이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이 일을 그르쳤다고는 하더라도 대단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 계미년033) 동인의 소위에 비하면 삼윤의 과실은 가벼운 것이다. 그런데 전일 동인이 일체 폐기하여 동지(同知) 벼슬도 제수하지 않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시배의 조처가 너무 심했다. 지금 이 사람은 범한 것이 중하지 않고 또 이재(吏才)가 있으니, 형조의 벼슬에 제수하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윤근수(尹根壽)에 이르러서는 그 과실이 또 더 가볍다. 그의 인품이 소탈하고 단아하여 문장을 좋아하였으며, 또 선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내가 조정으로 돌아오기 전에 이 사람이 이미 대사성으로 있었는데, 이 관직은 또한 시종(侍從)이나 청요(淸要)의 관직이 아니므로 버려두었던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지론이 동쪽 편도 들지 않고 서쪽 편도 들지 아니하여 편중과 편당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이이가 처음 조정으로 돌아올 적에 사대부들 사이에 세 가지 말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동인이 서로 무리를 이루어 기망(欺罔)하여 충신과 현인을 배척하고 모함하여 국가를 농락하고 무너뜨림이 이에 이르렀으니 청요직을 가벼이 제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으니, 이는 서인을 주도하는 자의 말입니다. 또 하나는 ‘삼사의 사람이 조급하고 망령된 과실은 있으나 또한 사류의 동아리이니, 절대로 배척해서는 안 된다. 다만 예전대로 쓰고 의심하여 틈이 없게 해야 한다.’라는 것이었으니, 이는 동인을 주도하는 사람의 말입니다. 또 하나는 ‘삼사의 사람이 분명히 일을 그르친 것이 도리어 을해년 삼윤의 무리보다 더한 점이 있었으니, 이는 삼윤의 전례에 의하여 청요직에 서용하지 않음으로써, 동서 양쪽에서 일을 만들어 낸 과실을 징계하고, 그 나머지 이른바 동서의 사류는 모두 수용할 것이요 한쪽에 치우쳐서는 안된다. 그리하여 전일 사류를 보합(保合)하여 함께 국사를 다스렸던 계책대로 행해야 한다.’ 하였으니, 이는 사림으로서 공심(公心)을 가진 자의 말입니다. 이이가 이 세 가지 말을 취하여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쓰되 세 번째의 말을 옳게 여겨, 제재하고 억눌러 보합시키는 권형(權衡)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이이가 예전부터 지녔던 소견으로 일호도 그 사이에 편당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어떤 문생이 이이에게 묻기를 ‘선생이 평소의 마음가짐이 지극히 공정하였고 나라를 근심하고 집을 잊으면서 초연히 동서의 밖에서 홀로 우뚝 서서 동인 쪽의 사류와 서인 쪽의 사류를 수습하여 기용하여 함께 국사를 다스리려 하였는데, 이것이 곧 처음 뜻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조정으로 돌아와서는 도리어 이른바 서인과 더불어 손을 잡고 함께 일을 하면서 동인에 대해서는 진(秦)나라 사람이 월(越)나라 사람의 야윈 것을 보듯이 팔짱을 끼고 우두커니 서서 보기만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들 서인의 세력이 조금 성해지고 동인의 세력이 조금 꺾였다고 여긴다. 선생이 조정에 있으면서 어떻게 오히려 편중하는 근심이 있음을 면하지 못함이 있단 말인가. 어쩌면 이른바 조제(調劑)하고 보합하는 도리에 미진한 점이 있어서 그러한 것인가.’ 하자, 이이가 ‘아, 그대의 의심이 옳다. 그러나 이는 나의 죄가 아니다. 대개 동서가 분당한 이래로 서인이 논의를 주장하면 동인을 배척하고 동인이 논의를 주장하면 서인을 배척하여, 각각 사견을 가지고 공론을 막아왔다. 그런데 내가 홀로 그 사이에서 쟁변하여 기필코 동서를 타파하고 사림을 조화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다만 사류가 화합하지 아니하면 마침내 나라가 나라꼴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인이 내 말을 쓰지 않다가 전일에 패하였으니 동인도 이를 경계해야 할 것인데, 동인이 또 패망한 전철을 답습하여 오늘날의 실패가 있게 되었으니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그러나 전일 동서가 논의를 주장할 때에는 삼윤(三尹)과 이발(李潑)의 무리가 주인이고 나는 객이었으므로 외로운 자취가 쓸쓸하여 말이 쓰여지지 못하고 실패가 서로 뒤따르게 되었다.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내가 바야흐로 주인이고 동·서인이 객이니 이야말로 조제를 이룰 수 있는 때이다. 다시 무슨 편중을 근심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오늘날의 형세는 서인은 내가 일찍이 동서를 타파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하여 차츰차츰 친근하게 나아오고, 동인은 내가 일찍이 들뜨고 조급한 자를 억제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하여 차츰차츰 멀어지고 있다. 삼사의 제배에 이르러서는, 다 물러가 움츠리고 서로 눈을 부릅뜨고 이리저리 관망하면서 찾아오지도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출사하여 직무를 보지 않는 자도 있었다. 국가의 허다한 직무를 이들을 위하여 오래도록 폐기할 수는 없었는데, 그렇다고 이른바 서인의 경우에도 한둘 재능이 모자란 사람이 없지 않았다. 이것이 전후 형적이 다른 것으로 외부 사람의 의심을 일으키게 된 까닭이다. 아, 내가 오늘 동인을 수습하고자 하는 것이 어찌 전일 서쪽 사류를 수습하고자 한 것과 다르겠는가. 그런데 시배가 나의 본심을 모르고서 의심을 품고 이리저리 관망하는 것이 이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나만의 허물이겠는가. 그러나 시배로 마음이 공정한 자는 오래도록 내가 하는 것을 살펴보면 반드시 나의 충심을 환히 알아서 함께 일을 할 것이고, 오늘날처럼 물러나 서서 엿보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이이의 본심이 어찌 이와 같은 데에 그치고 말려는 것이었겠습니까. 불행하게도 조정에 돌아와서 그 자리가 미처 따스해지기도 전에 갑자기 뜻을 품은 채 죽었으니, 이것이 이이가 구천(九泉)에서도 한을 두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정철의 위인은 효성스럽고 우애하고 청렴하고 개결하며 직무를 담당하는 재능에 여유가 있으나 논의를 주장하는 지혜는 부족합니다. 이때를 당하여 이이가 죽고 성혼이 떠나가자 국론이 정해지지 못하여 횡의(橫議)가 바야흐로 난무하니 인심이 의심을 품은 것이 이때와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제갈양(諸葛亮)과 관중(管仲) 같은 재능을 지닌 사람으로 담당하게 하더라도 진복(鎭服)시키기 어려울까 두려운데, 하물며 정철과 같은 자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정철을 위한 계책으로는 마땅히 스스로 역량이 미치지 못함을 알고서 몸을 이끌고 물러가는 것이 옳은데 국사를 홀로 담당하다가 스스로 패망을 자초하였으니 이는 실로 정철이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한 잘못입니다. 그러나정철의 위인은 역량이 부족하기는 하였지만 논의와 거조에 있어 조화하여 진정시키는 것을 힘써 주장하였기 때문에 세 사람을 유배보낸 것에 대해서도 방환(放還)시키기를 청하였으니, 그가 재앙을 즐겨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시배가 마침 한 사람도 정철과 서로 친숙한 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저 용모와 사기(辭氣)가 날카롭고 사나움을 보고 잘못 심각한 사람으로 여겼으니 이는 전연 정철의 위인을 모르는 자입니다.
정철이 조정에 벼슬한 지 20여 년이었는데 하루아침에 거친 초야로 유락(流落)하여 그 가난함이 숯으로 쌀을 바꾸고 밥상에 장이 없기에 이르렀으니, 그의 청고(淸苦)한 절조는 세상에 모범이 되고 세속을 격려하기에 족합니다. 이것이 이이가 종신토록 애중히 여기던 것으로 참으로 오늘날의 유속으로선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철이 패한 뒤로 이발이 들어왔습니다. 이발을 위한 계책으로는, 이미 이이·성혼과 친구의 교분이 있으니, 마땅히 이이·성혼의 본심을 발명하여 당적(黨籍)의 거짓됨을 공파하여 인심을 진정시키는 것이 옳았습니다. 그런데 이발은 양사의 논의를 미흡하게 여겨, 구봉령(具鳳齡)·홍성민(洪聖民)을 추론(推論)하여 심의겸의 당여(黨與)로 삼았습니다. 이 두 사람은 혹은 경학(經學)에 능하고 혹은 재국(才局)이 있어 모두 세리(勢利)에는 담박하였고 심의겸과는 평소 교분이 두터운 자취가 없음은 국인이 아는 바입니다. 다만 자기들과 논의가 다르다는 까닭으로 아울러 몰아서 함정으로 밀어 넣었으니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피혐하는 말에 이르러서는, 내용이 더욱 엄하여 병패(病敗)가 백출하였으므로 공격하지 않았어도 스스로 깨져버렸습니다. 다만 당초 삼사의 논의는 모두 사리에 가깝지 않은 말로 날조하여 무망한 것이 환하게 드러났으니 진실로 상세히 변명할 것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이발은 이이·성혼이 교유하였던 사람을 끄집어내어 말하여 짐작으로 논을 만들어 장황하게 현란시키는 말을 만들었으니 세상을 속이고 대중을 의혹시킬 수도 있기에 신들이 하나하나 밝게 변론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이이와 서인은 실로 합하여 한몸이 되었다.’고 한 것은 바로 정철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이 말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을해년에 이이가 정철에게 보낸 서간에서 시론의 편중됨을 극력 논쟁하여 적극 만회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이른바 ‘한몸이 되었다.’는 것이겠습니까. 그가 ‘이이의 소견이 서인과 하나가 되었다.’ 하였는데 이는 삼윤(三尹)의 무리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 말을 더 한층 심각하게 한 것입니다. 아, 어찌 그것이 사실이겠습니까. 이이가 심의겸과 삼윤을 청요직에 서용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과연 서인의 소견이겠습니까. 정철도 오히려 함께 한몸이 되었다고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심의겸과 삼윤이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이처럼 사리에 가깝지 아니한 말로 감히 군부의 앞에서 기망하였으니 어쩌면 마음이 혼란하여 전일 왕복한 논의를 다시 기억하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겠습니까.
그가 ‘사류들이 매양 이이가 서인을 구원하여 간사한 사람이 들어오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고 의심한다.’ 하였는데, 이른바 간사한 사람은 심의겸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심의겸은 외척일 뿐만 아니라 권리를 탐하고 세도를 즐겨하여 사류의 마음을 잃은 지 오래이므로 기묘년034) 의 소장에서 또 ‘외척에게 영원히 권병(權柄)을 주지 마시어 심의겸의 평생을 막으시라.’고 청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그가 다시 들어오는 길을 열어 준 것이겠습니까.
그가 ‘이이가 서인들에 대해 실로 항상 잊지 않고 수용하려는 의논이 있었다.’ 하였는데, 이발의 전의 서간에서 이른바 ‘이 논의가 매우 좋으니 이야말로 오늘날의 사세에 아주 걸맞는 말이다. 시비(是非)로 말하더라도 기타의 사류는 원래 간여한 바가 없는 것은 물론 그른 사람은 오직 심의겸 한 사람뿐이다.’ 하였고 김우옹의 서간에 이른바 ‘이 논의가 매우 좋다. 내 생각도 바로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여긴다. 지금은 삼윤을 그른 것으로 여기고 그 나머지 서인까지 아울러 연루하여 그르게 여겨서는 안 된다.’라고 한 것은, 서인 쪽 사류를 수용하자는 논의로서 바로 이이의 논의와 차이가 없이 꼭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것을 가지고 죄로 삼으니, 어찌 전후의 의논이 그렇게 반복이 심합니까. 이이가 기묘년 해주(海州)에 있을 적에 올린 소장에 ‘심의겸은 선을 지향하는 근후(謹厚)한 사람이다.’라고 한 것에 이르러서는, 이는 이이의 말이 아닙니다. 소장에 ‘심의겸이 조금 선을 지향하는 마음이 있다.’ 한 것은 그의 형적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심의겸이 조정에 벼슬하던 때를 당하여 한 시대의 명덕(名德)으로 이황(李滉) 같은 제현(諸賢)들을 존모하여 모두 왕래하였고 을사 사화(乙巳士禍)의 유인(遺人)들도 힘껏 추천하여 끌어 들였으니, 이것이 ‘조금 선을 지향하는 마음이 있다.’고 지목한 이유인 것입니다. 근후(謹厚)라는 두 글자에 이르러서는 소장에 실지로 이런 말이 없었습니다. 이이가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마음도 먹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사년035) 심의겸을 논박하는 말에 ‘권력을 탐하고 세도를 즐겨한다.’는 것을 죄로 삼았고, 그때 대사간을 사직하는 소장에도 ‘심의겸은 기세가 장황한 사람이다.’ 하였습니다. 아, 권력을 탐하고 세도를 즐겨하며 기세가 장황한 사람이 어찌 근후한 자의 근처에 갈 수 있겠습니까. 글에 쓴 것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증험할 수 없는 평일의 언론이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그가 ‘계미년036) 의 한 장의 소장에는 말이 더욱 준맹(峻猛)하였는데, 심지어 자기를 따르지 아니한 자를 배척하려 하기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이이의 이 소장은 실로 전일 이발의 무리들에게 보낸 서간과 그 뜻이 터럭끝만큼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가 ‘미욱함을 고집하여 깨닫지 못하는 자는 재억(裁抑)한다.’ 한 것은 바로 앞서의 서간에서 이른바 ‘의논이 중도에 지나친 자는 재억한다.’는 말입니다. 그가 ‘사심을 품고 어거지로 변명하는 자는 배척하여 멀리한다.’ 한 것은, 바로 앞서의 서간에서 이른바 ‘때를 타고 부회하는 자는 배척하여 멀리한다.’는 말입니다. 이이의 논의는 한결같았는데, 이발은 앞서는 지당하다고 하고 뒤에 와서는 준맹하다 한 것은 또한 무슨 의도이겠습니까. ‘자기를 따르지 않는 사류를 배척하고자 한다.’ 한 말에 이르러서는, 소장에 본래 이런 말이 없습니다. 어쩌면 이발이 마음에 분노가 있어 자신의 소장의 괴란(乖亂)이 이처럼 극도에 이름을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혼이 이이를 구원한 말을 가지고 ‘조정 사대부를 들어 붕당을 지어 참소하여 교묘하게 중상한다고 지목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또 성혼의 소장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자입니다. 그때 성혼이 바로 주상이 삼사의 무망(誣罔)만 보고 동인 쪽 사류를 아울러 의심할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그의 소장에 ‘그러나 오늘날 조정의 논의가 어찌 모두 의도적으로 이이를 죄주기 위해 이에 이르렀겠는가. 부회하는 자가 때를 타고 미워하여 공격하였을 뿐이다…….’ 하였으니, 사류를 아끼는 마음이 매우 환히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과연 혼동하여 분별이 없는 말입니까. 성혼의 의사는 삼사의 부회하는 사람을 두고 ‘붕당을 지어 참소하여 교묘하게 중상한다.’ 하였을 뿐입니다. 부회하는 사람이 사류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발의 무리가 곧 이렇게 운운한다는 말입니까.
또 ‘이이가 공론을 돌보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사정(私情)만을 따라 그때 자기를 공격한 사람을 다 배척하고 전일 뜻을 잃었던 무리를 다 기용한다…….’ 하였으니, 이 말은 더욱 무망(誣罔)한 것입니다. 이이가 전형(銓衡)을 주관하던 때에, 김우옹(金宇顒)·김홍민(金弘敏)·한효순(韓孝純)·성영(成泳)의 무리로 말하면 이들은 이른바 그때 자기를 공격한 자들었으나 모두 기용했으며, 삼사의 직에 있던 사람에 이르러서는 일을 그르친 과실이 도리어 삼윤(三尹)보다 더 심하였으므로 한효순·성영(成泳) 이외에는 삼윤의 전례에 의하여 아울러 청요직에 제수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과연 자기를 공격한 자를 다 배척한 것입니까.
정철·신응시(辛應時)·이해수(李海壽)의 무리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전일 뜻을 잃었던 자들이지만 그들의 재능과 행실이 동인 쪽 사류에 못하지 않았으므로 이이가 아울러 청요직에 주의(注擬)하였습니다. 그 나머지 한때 사류로서 덕망이 있는 자는 동·서를 논하지 않고 재능에 따라 관직을 제수하고 조금도 시기하거나 방해함이 없이 구애하지 않고 통용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전일 뜻을 잃은 자들을 다 기용한 것입니까. 이야말로 이이가 평일 동·서를 타파하고 사류를 보합하려는 마음이 자기가 논의를 주장하던 때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한둘 기용할 만한데도 미처 기용하지 못하고 기용해서는 안 되는데도 잘못 기용한 자가 없지는 않으나 또한 환조(還朝)한 초두에 채방(採訪)이 미진해서 그랬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이이가 죽은 뒤에는 시세에 빌붙어서 도리어이이·성혼을 공격하여 공을 세우려 한 자가 간혹 있었습니다. 만일 이것을 가지고 이이의 지감(知鑑)이 미진하다고 한다면 그럴 수는 있겠으나 이것이 과연 공론을 돌아보지 않고 한결같이 사정(私情)을 따른 것이겠습니까.
또 ‘동료가 이이·성혼의 일을 지적해 논한 것이 바로 그 결점에 적중되었으므로 그르게 여기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발이 과연 이이가 종시 심의겸과 체결하여 함께 모의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며, 과연 성혼이 심의겸의 농락을 받은 사람으로 여기는 것입니까. 이발이 과연 그렇게 여겼다면 이는 종전에 이이·성혼의 의논을 추존한 것이 모두 자기를 속이는 것임과 동시에 남을 속이는 것이 됩니다.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면 또 어찌 그 결점을 바로 적중시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진퇴(進退)에 근거한 바가 없어 논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사람의 열복을 바라고자 하니 어렵습니다.
또 ‘이이와 성혼이 유배된 세 사람이 돌아오도록 청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는 이발이 틀림없이 이이와 성혼이 환조(還朝)하여 계달한 말을 듣지 못한 것입니다. 이이·성혼은 인견(引見)하던 날 너그러이 용서하도록 힘껏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게 되자, 물러나와 서로 ‘이 세 사람에게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간언(諫言)하다 죄를 얻어 먼 변방에 유배되었으니 후사(後嗣)에게 보일 것이 못된다. 반드시 말감(末減)을 굳이 청한 뒤에야 일이 바야흐로 중도를 얻게 될 것이다. 이 일을 힘껏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이이가 죽고 성혼이 떠나가서 드디어 시행되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이이가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전일 한 말을 다시 아뢰어서 허락 얻기를 목표하였을 것입니다.
‘경중을 헤아리게 하라.’는 말을 잘못 본 것에 이르러서는 ‘이이가 대간과 곡직(曲直)을 송변(訟辨)하려 한다.’ 하였습니다. 이이의 의견으로는 ‘임금을 업신여기고 국사를 천단하는 것은 곧 인신으로서 첫째가는 죄이니 이 죄명을 지고서 염치없이 출사(出仕)할 수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그런데 이때에 변경의 일이 바야흐로 급박하여 일이 적체된 것이 많았으므로 삼공(三公)이 출사시킬 것을 계청하였고 위에서도 도타이 유시하여 나오게 하였으므로 부득이 계사에서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신의 죄를 들어 좌우 신하들에게 의논하고 여러 대부에게 물어 경중을 헤아리게 하소서. 만일 용서할 수 있다고 한다면 신이 미안하긴 하지만 감히 힘써 따라 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던 것입니다. 이이의 의견은, 조정에서 자기 죄의 경중을 헤아리게 하여 다행히 큰 죄에 이르지 않았다고 한 뒤에야 감히 나아가서 직무를 봄으로써 주상의 하교를 받들겠다고 여긴 것뿐이지, 어찌 감히 대간과 경중을 따져 헤아리려 한 것이겠습니까. 이이가 말한 것은 진실로 문리가 통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면 반드시 이처럼 잘못 보기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삼사 및 이발과 김홍민(金弘敏)의 무리만이 알아보지 못하였으니, 어쩌면 마음이 먼저 어지러워 상도(常度)를 잃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글에 써서 이처럼 분명한 일도 오히려 전도되고 착오됨을 면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천하의 시비를 분변하고 천하의 큰 일을 논하는 데 있어 어긋남이 없고자 한들 되겠습니까.
계사의 끝에 ‘원하건대 시종의 곡절을 통찰하시어 보합하고 진정시켜 화평한 복을 도모하소서.’한 것에 이르러서는, 이 말이 더욱 전도 착오되었습니다. 이이·성혼은 지극히 공정한 사람인데,이발이 조금도 용서없이 배척하고 헐뜯은 것이 이러하였으니, 하물며 다른 사람이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이발이 이이·성혼을 배척하고 또 장차 누구와 더불어 보합하며 누구와 더불어 진정하며 누구와 더불어 화평을 도모하려는 것입니까. 이것이 논의를 정립함에 있어 사리에 어긋나 문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인 것입니다. 만일 가슴이 흐리멍덩하고 혼란한 자가 아니라면 이러한 전도 착오된 의논이 어디로부터 나오겠습니까.
아, 이발이 스스로 평일에 경제(經濟)로는 이이를 허여하였고 도학(道學)으로는 성혼을 허여하였습니다. 또 재주가 뛰어나고 학문이 넓으며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하고 임하(林下)에서 지조를 지키고 몸을 닦아 값을 기다리며 나아가고 물러남과 벼슬하고 벼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일마다 예전 현인을 인용해가면서 두 사람을 허여하였으니 이발이 이이와 성혼에 대해서 그 심사를 전연 모른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곧 논의가 날카로운 신진의 무리와 합하여 하나가 되어서는 그들의 심사를 한 마디 말도 드러내어 밝히는 것이 없고 일호도 애석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충후한 군자의 기상이겠습니까. 이것이 이발이 너무도 각박하게 처신한 것으로서 조야의 공론이 그에 대해 분히 여기는 것은 물론 동인으로 이름하는 자도 이것으로 의심하는 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발이 이에 이르게 된 것은 또한 어찌 이발의 마음뿐이기만 하겠습니까. 대개 동·서가 분당한 뒤로부터 서로 모함하여 이익을 추구하고 양쪽 사이에 일을 만들어낸 탓이었으니, 예컨대 윤기신(尹起莘)·이순인(李純仁)·정여립(鄭汝立)의 무리가 얼굴을 돌리고 말을 만들어내어 이발의 무리의 마음을 점차 고혹시켰으므로 평일의 의논이 대체로 면종(面從)하는 작태가 많았던 것입니다. 계미년037) 이후부터는 이발이 호남에서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머물고 있었는데, 전일 빌붙은 무리들이 길에서 들은 말을 주워모아 부연하여 더 보태었고 심한 경우에는 터무니없는 말을 만들어서 일일이 이발에게 급히 기별하였습니다. 물이 배어들어가듯이 차츰차츰 헐뜯는 참소와 살을 에는 듯한 통절한 호소에는 비록 마음가짐과 공평한 사람이라도 조금쯤 흔들려 미혹됨이 없을 수 없는데, 하물며 이발과 같은 위인이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시험삼아 논하겠습니다. 옛날 이른바 동인이란 사람은 심의겸을 배척하는 것으로 이름을 얻었는데 오늘날은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는 사람이 동인이 되었고, 옛날 이른바 서인이란 사람은 심의겸을 구원하는 것으로 이름을 얻었는데 오늘날은 이이와 성혼을 높이는 사람이 서인이 되었습니다.외척을 배척하는 사람은 진실로 청의(淸議)라고 할 만하나 충현(忠賢)한 사람을 공격하는 사람은 사류라고 할 수 없으며, 사사로이 사귀는 친구를 구호하는 사람은 진실로 편당한다고 할 만하나 유종(儒宗)을 존모(尊慕)하는 사람은 공론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는 것이 시인(時人)이 발신(發身)하는 자본이 되었으므로 동인으로서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으며 외척을 배척하는 것이 실로 사림 청류(淸流)의 논의이므로 선비로서 심의겸을 배척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동서의 이름이 전일과 달라서 분변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인 것입니다.
아, 동서의 말이 있은 이래로 서인의 명목은 그 말이 네 번 변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심의겸의 친구와 제배(儕輩)를 서인이라 하였으니 삼윤(三尹) 같은 무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다음에는 서인을 구원하는 자를 서인이라 하였으니 정철 같은 무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동인도 아니고 서인도 아니며 중립하여 치우치지 않는 사람을 서인이라 하였으니 이이와 같은 무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사림으로서 이이와 성혼을 높일 줄 아는 사람을 서인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조야(朝野)의 공론을 지닌 사람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사실에 의거한 말이겠습니까. 이러므로 공론이 열복하지 않았고 따라서 이른바 서인이란 자가 오늘날에 와서 더욱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이이는 공론을 하다가 간사한 사람에게 펀당한다는 이름을 얻었고 성혼은 이이를 구원하다가 사적으로 구호한다는 이름을 얻었으며, 중외(中外)의 수많은 선비들은 이이와 성혼을 구원하다가 서인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백대의 공론은 속일 수 없지만 일시의 억울함을 당한 것은 어찌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아, 오늘날 이이를 공격하는 까닭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일개 심의겸을 말거리로 삼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신들이 무망(誣罔)한 정상을 일일이 조목조목 진달하여 공파(攻破)하겠습니다.
대개 이이는 심의겸과 족분(族分) 관계로 서로 알기는 하였으나 그와 친밀히 지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이가 전랑에 천거되었을 적에 심의겸이 저지하였는데 김계휘(金繼輝) 등이 힘껏 구원한 데 힘입어 해결되었으니, 다른 것은 논할 것 없이 오직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이이가 본디 심의겸과 서로 좋게 지내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심의겸이 권력을 잡은 지 10년이나 되었습니다. 이이가 이때에 매양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가기를 요구하였고 한 달도 조정에 편안히 있은 적이 없었으니, 빌붙어 체결한 자가 과연 이러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이의 명성이 날로 성대해지자 한때의 사대부가 그와 얼굴을 알기를 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이가 때로 서울에 이르면 심의겸이 대중을 따라 와서 만나보았을 뿐입니다. 심의겸이 패망한 뒤에 전일 심의겸을 붙좇던 무리가 일시에 동인에게 복종하여 창을 거꾸로 들고 심의겸을 공격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사대부로서 심의겸과 아는 자는 모두 심의겸을 병을 전염시키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심의겸이 때로 혹 가서 보면 싫어하고 미워하는 빛을 나타내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나, 이이는 예전처럼 대우하여 가까이하지도 않고 멀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세상 인정이 가소로운 점인 동시에 이이가 말을 듣게 된 까닭입니다.
이발의 무리는 이이가 신사년038) 에 심의겸을 끊지 아니한 것을 그르게 여겼습니다만,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도리 또한 한 가지 방법만이 아닙니다. 범연히 서로 아는 자가 있고 정면(情面)으로 서로 아는 자가 있고 심사(心事)가 서로 통하는 교분으로 사귄 자도 있고 선(善)으로 책면하고 인(仁)으로 돕는 도의(道義)의 교분으로 사귀는 자도 있습니다. 이이가 심의겸에게는 족분 관계로 잘 대우하였을 뿐이고 당초 교분의 도리로서는 말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또 심의겸의 대단한 죄악이 있음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한갓 시인(時人)에게 배척받는다는 것 때문에 그것이 자기에게 전염될까 염려하여 하루아침에 버리고 끊어 버리면 이것은 천장부나 하는 짓이요 또한 정인 군자의 일이 아니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만일 이이가 참으로 심의겸이 대고(大故)가 있는 것을 알았다면 마땅히 죄를 짓던 날에 끊어야 할 것이고 신사년에 끊는 것은 부당합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조헌(趙憲)이 이른바 ‘뜬말이 있은 뒤에 이이가 자취를 끊고 서로 찾아보지 않았다.’고 한 것은 어찌 심히 가소로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뜬말로 인하여 곧 사람을 끊었다면 이것이 어찌 사군자가 사람을 대하는 도리이겠습니까.
그러나 이이가 심의겸에게 대단한 죄악이 있다는 것을 자세히 몰랐으나 또한 권세를 탐하고 지식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김효원은 쓸 만하고 심의겸은 쓸 만하지 않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기묘년039) 의 소장에 또 ‘동서를 탕척시키고 모두 재능대로 임용하더라도 심의겸은 다시 요직에 두어서는 안 된다.’ 하고, 심지어 ‘영원히 외척에게 권세를 주지 말라.’고 청하여 심의겸이 다시 들어오는 길을 막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올린 바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 깊이 주의시켰으니, 이것이 과연 일호라도 심의겸의 처지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다만 사람을 논함에 있어 마땅히 마음으로 해야 하고 상벌을 시행함에 있어 마땅히 형적으로 해야 하므로 심의겸은 아까울 것이 없으나 일시의 서인 쪽 사류를 아울러 연루시켜 다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은 이이의 소견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또한 유성룡·이발·김우옹의 무리도 전일 논한 바입니다. 계미년040) 성비(聖批)에 ‘심의겸은 간인이다.’라는 분부가 계신 것을 본 뒤에 이이 또한 비로소 의심하여 ‘이 사람이 권력을 탐하고 세도를 즐겨서 본디 수백(粹白)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그가 척리(戚里)임을 빙자하여 임금께 죄를 얻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궁금(宮禁)의 일은 비밀스러워서 외신(外臣)이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또한 의심할 따름이고 억측할 따름이었습니다. 만일 이이가 심의겸을 알지 못한 것을 죄로 삼는다면 유성룡·이발·김우옹의 무리와 그 책망을 같이 받아야 합니다. 어찌 이이만 탓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로써 살펴보면 그의 마음과 형적이 해와 별처럼 환하게 밝으니, 어찌 한 점인들 의심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아, 이이가 심의겸과 안 것을 시배가 애당초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심의겸이 배척당하던 초기에 그의 제배들은 당여(黨與)로 지목받지 않은 이가 없었으나 이이만은 감히 지목하는 가운데 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온 조정이 서로 번갈아가며 천거하되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염려한 것은 애당초 친밀한 형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동인의 지론이 편중된 데 이르러 이이가 홀로 동서를 타파하자는 논의를 주장하면서 들뜨고 조급한 무리를 통렬히 억제한 뒤에야 좋아하지 않는 자가 비로소 많아졌고 터무니없는 말을 만들어내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이이가 심의겸과 사적으로 지낸다.’ 하더니, 계미년 이후 비로소 함정으로 몰아넣고서 당여로 지목하였습니다.
아, 이이는 한 사람입니다. 이이의 덕업(德業)과 경술(經術)을 위에 천거한 것도 시배이고 징소(徵召)하기를 계청한 것도 시배이고 차자를 올려 머물게 하도록 청한 것도 시배이고 오늘날 배척하여 얽어 모함하는 것도 시배입니다. 아, 시배에게 거스르기 전에는 이이가 도학과 경륜이 있는 대현(大賢)이 되었다가 시배에게 거스르게 된 뒤에는 이이가 사악한 붕당을 만든 소인이 되었으니 어찌 앞뒤로 헐뜯고 칭찬함이 이처럼 서로 반대된단 말입니까.
이이가 참으로 심의겸과 체결하고자 하였다면 마땅히 심의겸이 뜻을 얻고 있던 때 체결했어야 하는 것이지, 의겸이 실세한 뒤에 체결한다는 것은 부당한 말입니다. 무슨 까닭으로 심의겸이 패하기 전에는 이이가 전원에 물러나 살면서 나아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는 쉽게 여겼습니까.경진년041) 에 소명(召命)을 받고 서울에 들어오던 때에는 심의겸이 실세한 지 이미 오래되어 먼 외방으로 쫓겨났고 동인이 바야흐로 시론을 주장하고 있었던 시기입니다. 이이가 체결하고자 하였다면 어찌 논의를 주장하고 있는 시배에게 이견을 세우고 실세한 심의겸에게 체결하였겠습니까. 하물며 ‘체결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사리 사욕을 이루려는 것이니, 자기의 사리 사욕을 이루지 못한다면 또한 무엇 때문에 체결하겠습니까.
아, 시배의 기세가 치성할 때에도 오히려 끌어들여서 당여로 삼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세상이 천하게 여겨 버려버린 심의겸이 끌어들여 당여로 삼을 수 있었겠습니까. 일신의 영욕과 화복도 오히려 그의 마음을 움직이고 절조를 변개하게 할 수 없는데, 스스로를 도모하지도 않는 사람이 더구나 심의겸을 위해 도모하겠습니까. 이이의 삼사는 오직 이와 같았으므로 선세(先世)의 대부(大夫) 백인걸(白仁傑) 같은 이도 특별히 이이와 성혼을 천거하여 특립독행(特立獨行)하는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백인걸은 사조(四朝)의 숙덕(宿德)042) 이며 을사(乙巳)의 유직(遺直)043) 으로 일찍이 심의겸을 배척한 것은 국인이 아는 바입니다. 만일 이이와 성혼이 조금이라도 심의겸에게 오염된 형적이 있었다면 어찌 외척에게 편당하는 사람을 국가를 위해 현인으로 천거함으로써 전하를 저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이와 심의겸이 본래 친밀한 형적이 없었음을 여기에서 더욱 알 수 있습니다.
아, 시배로서 이이를 공격하는 자가 어찌 모두 시세에 빌붙어서 충현(忠賢)을 시기하는 자들이겠습니까. 그 가운데에도 마음가짐이 조금 공정하나 정의(情意)가 막혀서 이이의 심사를 모르는 자도 있겠고 식견이 밝지 못하여 시배의 논의에 동요되지 않을 수 없는 자도 있겠고 또한 신진 후생으로 붕당의 논의에 오염되어 그른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한 자도 있겠고 또한 마음으로는 시론(時論)을 그르게 여기면서도 역량이 부족하여 남을 따라 나아가고 물러나는 자도 있겠고 또한 시종 곡절을 전혀 알지 못하고서 대중을 따라 뇌동한 자도 있겠습니다. 이러한 무리들은 하루아침에 깨달으면 또한 반드시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스스로 뉘우치는 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오늘날의 사대부는 모두 임금 섬기는 의리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대개 임금을 섬기는 의리는 속이지 않는 것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시배 중에 시론이 무망(誣罔)된 것임을 아는 자가 한두 사람 없지는 않으나 곧 그들과 함께 어울려서 하나가 되었으며, 혹은 실지로 이 사이의 시비를 모르고 억지로 모르면서도 아는 체하는 자도 있습니다. 만 사람이 부화(附和)하여 한 입에서 나온 것처럼 함께 같은 말을 하여 마침내 한 사람도 실지로 임금에게 고하는 자가 없으니, 이것이 과연 이른바 속이지 않는다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날의 시배는 모두 임금 섬기는 의리를 모르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 편당하여 임금을 속이는 것은 그 죄를 바로잡을 수 있으나 시론에 한 번 거스르면 종신토록 폐기됩니다. 오늘날의 시배는 부귀에 뜻을 두지 않은 자가 적으니, 당초 옛 사람이 임금을 섬기던 의리로 책망할 수는 없습니다.
아, 일세(一世)의 인재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능히 우뚝이 스스로를 지켜 만 마리 말이 함께 달리는 속에서도 의연히 서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그 사이에서 스스로 벗어난 사람이 없는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습니다. 아, 이이는 죽었습니다. 오늘날 한 세상 사람을 다 몰아다가 모두이이가 소인이라고 하게 한들 또한 국사에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대저 군자와 소인의 구분은 오직 의(義)와 이(利) 이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입니다. 특립독행하여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하며 부귀를 사모하지 않고서 나아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는 쉽게 하는 사람은 군자로서 의리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시세에 빌붙어서 자신을 보존하고 지위를 튼튼히 하며 작록을 탐하면서 나아가기는 쉽게 하고 물러나기는 어렵게 여기는 사람은 소인으로서 이익을 좋아하는 자입니다. 오직 이익만을 좋아할 뿐이므로 이익이 외척에게 있으면 외척에게 빌붙고 이익이 권간(權奸)에게 있으면 권간에게 빌붙고 이익이 시론(時論)에 있으면 시론에게 빌붙어서 오직 이익이 있는 것만 보고서 향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기미를 쫓아가고 향기를 따라서 가지 않는 곳이 없고, 파리처럼 이익을 찾아다니고 개처럼 분주히 쏘다니어 몰아 내버려도 다시 돌아옵니다. 심한 경우에는 이익이 아내와 자식을 죽이는 데에 있으면 아내와 자식을 죽여가며 추구하고, 이익이 임금과 아비를 시해하는 데에 있으면 임금과 아비를 시해하면서 빼앗으니, 이것은 이익을 좋아하는 자들의 일입니다.
오직 의리만을 좋아할 뿐이므로 이익이 외척에 있어도 빌붙지 않고 이익이 권간에게 있어도 빌붙지 않고 이익이 시론에게 있어도 빌붙지 않고 오직 의리의 있는 것을 보아 그를 따를 뿐입니다. 그리하여 영화로와도 즐거워하지 않고 곤욕을 당하여도 놀라지 않고 불러도 오지 않고 내몰아도 가지 않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의리가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데에 있으면 자신을 희생하는 것도 돌아보지 않고 의리가 일족이 멸하는 데에 있으면 일족이 멸하여도 사양하지 않으니 이것은 의리을 좋아하는 자들의 일입니다.
아, 의리를 좋아하는 자는 나라를 위하고 이익을 좋아하는 자는 자신을 위합니다. 이익을 좋아하면서 임금을 사랑하는 자는 있지 않고 의리를 좋아하면서 임금을 버리는 자는 있지 않습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오늘날의 사대부 가운데 누가 군자로서 의리를 좋아하는 자이겠으며 누가 소인으로서 이익을 좋아하는 자이겠으며 누가 부귀를 사모하지 않고 나아가기는 어렵게 하고 물러나기는 쉽게 하는 자이겠으며 누가 작록을 탐하고 나아가기는 쉽게 하고 물러나기는 어렵게 여기는 자이겠으며 누가 시세에 빌붙어서 자신을 보존하고 지위를 튼튼히 하는 자이겠으며 누가 특립독행하여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하는 자이겠습니까.
혹시 하루아침에 외척과 권간이 국권을 도둑질하여 생살(生殺)과 위복(威福)이 그의 손에서 나오게 된다면, 벼슬을 얻기 전에는 얻으려 근심하고 벼슬을 얻은 다음에는 그것을 잃을까 근심하여 바람부는 대로 휩쓸리는 자들이 이익을 좋아하는 무리에게서 나오겠습니까, 아니면 의리를 좋아하는 무리에게서 나오겠습니까. 강경하고 정직하여 흔들리지 않고 횡류(橫流)의 지주(砥柱)처럼 우뚝이 서는 자들이 의리를 좋아하는 무리에게서 나오겠습니까, 아니면 이익을 좋아하는 무리에게서 나오겠습니까.
아, 오늘날의 이른바 사대부로서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는 자가 만일 명예와 절조를 아껴서 조금이라도 화평론을 주장하여 형적을 깨뜨려버리고 일시의 인재를 수합하여 그들과 더불어 천직(天職)을 함께 다스려 직무에 협력함으로써 위로는 성상께서 밤낮 정무에 애쓰시는 근심을 풀어드리고 아래로는 사림의 공론이 답답해 함을 위로해 주는 것으로 스스로 만년을 보전할 계획으로 삼는다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부회하는 무리가 시론을 주장함에 따라 괴란(乖亂)이 날로 더욱 심해집니다. 조정에서는 오직 당색의 이동(異同)을 가지고 이이와 성혼을 배척하는 것을 일삼을 뿐이고 국가의 치란(治亂)과 생민의 휴척(休戚)은 까맣게 잊어버리는 지경에 버려두니, 인심이 열복하지 않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공의가 함께 분히 여기고 지사가 팔을 내두르며 조헌(趙憲)이 과격한 논의를 제기하게 된 까닭입니다.
대개 조헌이 한 말은 이이와 성혼을 신구(伸救)하는 것을 주로 하였으나 그 소견이 일방적이어서 스승의 뜻에 어긋났습니다. 사람을 논할 적에는 좋아만 하여 악을 알지 못하고 미워만하여 선을 알지 못하면 또한 일시의 공론을 열복시킬 수 없으니 또한 잘못입니다. 그러나 조헌의 뜻은 이미이이와 성혼을 유림의 영수로 삼고 있으므로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는 자를 보면 곧 가리켜 시기하는 사람으로 삼고 이이와 성혼을 추존하는 자를 보면 곧 가리켜 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삼으며 인물의 본품(本品)이 어떠한가는 묻지 않고서 일체 사정(邪正)으로 단정하였으니 이것이 논의가 분격하여 중도에 맞지 않고 스승의 뜻을 크게 어기게 된 까닭입니다.
대저 사람을 논함에 있어 형적만을 보고 본심을 규명하지 않으면 번번이 사람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는 자는 기묘년에 뭇 소인들이 사림을 일망타진한 것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기묘년에는 사림이 합하여 하나가 되고 오직 소인만이 사림을 모함하였으므로 형색이 분변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므로 사림을 공격하는 자를 모두 소인이라 하는 것이 마땅하였거니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당초 사림이 나뉘어 둘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동인으로서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는 자가 시세에 빌붙어 시기 모해하는 무리가 많이 있기는 하나 또한 잘못 속아서 저지당하여 그렇게 하는 사람도 없지 않으니, 어찌 본심을 규명하지 않고 일체 소인으로 규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헌의 소장에서 공격한 김우옹·유성룡·김홍민(金弘敏) 같은 몇몇 신하에 이르러서는 장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인물을 논하자면 이 또한 일시의 청류(淸流)로서 이이가 일찍이 칭허(稱許)한 사람들입니다. 다만 뜬말에 잘못되고 한쪽에 치우치게 집착하여 점차 침고(沈痼)되어 이에 이르렀을 뿐입니다. 또 이 몇몇 신하는 소견이 편벽되어 이이의 심사를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그 또한 장점을 취함에 있어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몇몇 신하가 일시의 청류라고는 하나 그 가문에 출입하는 자는 대다수가 부회하고 아첨하는 무리였는데, 이를 재억(裁抑)하지 못하였을 뿐만아니라 일찍이 그 사이에 동이(同異)의 의견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서로 어울려서 하나가 되었으면 사론의 의심을 초래하는 것은 또한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쪽 말만 듣고 간사한 마음이 생겨 이러한 사리에 어긋나는 비난이 있게 된 것이지, 애초에 어찌 그 사이에 사심(邪心)을 가지기야 했겠습니까.
대개 이 몇몇 신하는 역량과 소견이 세도(世道)를 담당하여 들뜨고 조급한 자를 진정시키고 처지를 화평하게 하여 서로 화합해서 직무에 힘쓰는 복을 누리게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지위를 잃을까 근심하는 유속(流俗)의 무리가 전연 이해에 마음을 두고 명의(名義)를 돌아보지 않은 채 시세에 빌붙어서 날마다 공격만을 일삼고 탐욕을 부리고 혼탁시키고 시기 모함하는 경우에 비하면 또한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지금 조헌이 비유를 든 것이 도리에 맞지 않아서 이 몇몇 신하를 비인(匪人)044) 으로 삼고 기대항(奇大恒)은 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 것으로 허여하고 심의겸은 의리의 명성을 드날린 것으로 지목하였습니다. 서인인 경우에는 한 사람도 단점을 말한 것이 없고 동인인 경우에는 한 사람도 장점을 말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과연 이이의 평일 소견이었겠습니까. 거리에 떠도는 말을 주워 모아 성상께 아뢴 데 이르러서는,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뜻은 간절하나 광망(狂妄)하고 미련한 과실은 숨길 수 없습니다. 어쩌면 조헌이 근년 이래로 남쪽 고장에 유락(流落)하여 있으면서 오랫동안 사우(士友)의 논의를 접하지 못하였으므로 떠나 있던 나머지 고루하여 이러한 어긋남이 있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찌하여 한결같이 이이의 평소의 논의와 서로 틀린 것이 이처럼 심하단 말입니까.
아, 이이가 스스로 수립한 것은 광명정대하고 천지처럼 우뚝하여 후세에 전할 만하고 옛 사람에 부끄럽지 않은데, 살아서는 그 포부를 당세에 조금도 시행해 보지 못하고 죽어서는 그 심사(心事)를 드러내 밝힐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조헌 같은 자에 이르러서는, 그 문하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아 존모(尊慕)하는 성의는 있으나 사우(師友)의 뜻을 환히 알지 못하였고, 논설하는 바도 또 스승의 도를 발명하지 못하였으니 구원(九原)에 있는 죽은 스승의 영령이 어찌 여기에 마음을 쓰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조헌이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또한 시대를 한탄하고 세속을 슬퍼하는 뜻과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실로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설(辭說) 가운데 어찌 참으로 채택할 만한 것이 없기에 삼사가 번갈아가며 소장을 올려 힘껏 공격하고 심지어 조헌을 흉험(凶險)하고 교사(巧詐)한 사람으로 여기기에 이른단 말입니까. 아, 어찌 그것이 사실이겠습니까. 과연 그 말이 사실이라면 오늘날 부회하는 무리가 바야흐로 시론(時論)을 주장하여 그들의 손 안에서 진퇴가 결정되는 상황에서 이 무리에게 빌붙지 않고 생로사병(生老死病)의 지경에 이른 사람을 구제하려 하는 것은 그럴 리가 없는 것입니다. 미치고 어리석다고 한다면 가하거니와 흉험 교사라는 네 글자가 어찌 조헌의 마음을 열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또 ‘조헌이, 이이가 자기를 천거해 준 은혜를 잊지 못하여 이 소장을 올렸다.’ 하니, 이것은 더욱 무망(誣罔)하는 말입니다. 조헌의 인품에 대해서는 이이가 옛 사람을 사모하고 선을 좋아함을 취하였으나 벼슬길에 천거하여 발탁한 것은 실로 이발·김우옹이 한 것이니 이것은 나라 사람이 함께 아는 일입니다. 만일 조헌이 자기를 천거해 준 은혜를 갚고자 하였다면 마땅히 이발의 무리에게 갚아야 할 것이요 이이에게 갚는 것은 부당합니다. 설사 이이가 조헌에 대해 천거 발탁해 준 은혜가 있어 조헌이 잊지 못하여 그렇게 하였다 하더라도 대중의 성쇠에 따라 향배를 결정하는 자에 비하면 또한 거리가 멀지 않겠습니까. 작위(作爲)가 없이 하는 것은 옛 사람도 허여한 것인데, 지금 이것을 죄로 삼고 저것을 옳게 여기니 그 또한 잘못입니다. 신들이 일개 조헌을 위해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시배(時輩)가 사람을 공격함에 있어 없는 것을 얽어내어 있다고 하면서 장황하게 현란시키는 정상과 전후의 방법이 마치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과 같으니, 이를 살펴 그것의 허무함을 알게 된다면 곧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도 이것을 통하여 저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이와 성혼을 논한 말에 이르러서는 이발(李潑)의 여론(餘論)을 조술(祖述)한 것인데 옥당의 차자에 이르러서는 그 말이 스스로 서로 모순되는 것이 마치 두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과 같습니다.이이를 이미 세도(世道)를 만회하는 군자라고 허여하고 또 성혼에게 임하(林下)에서 학문하는 선비라고 허여하였으니, 두 사람은 당세에 구하여도 비할 만한 사람을 얻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또 외척에게 빌붙었다 하면서 실신(失身)으로 지목하였으니 이 두 사람은 백이(伯夷)의 마음에도척(盜蹠)의 행실을 지닌 것이니 어찌 이치에 맞는 말이겠습니까. 이는 때를 타고 부회하는 무리가 이 논의를 주창하자, 신진의 사류가 이 사이의 곡절을 알지 못하고 대중을 따라 뇌동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신들은 또 생각건대, 돌아간 스승이 전후 올린 소장이 무려 누만 언인데 건백한 내용은 모두가 국가의 대계였습니다. 만년에 풍운(風雲)의 시기를 만났으나 곧바로 하늘이 그를 빼앗아갔기 때문에 평생의 포부를 하나도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오늘날 사림이 함께 팔을 내두르면서 한탄하는 까닭입니다.
대저 우리 국가는 성왕(聖王)과 신군(神君)이 계승하여 정치 도구가 다 완비되어 앞서는 《경제육전(經濟六典)》의 제작이 있었고 뒤에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저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 연산(燕山)이 선왕의 전형(典刑)을 전복시켜 음학(淫虐)한 폐정(弊政)을 창시하자, 중종(中宗)이 반정(反正)하여 모든 정치가 옛날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연산의 여법(餘法)이 아직도 다 개혁되지 않아서 오늘날까지 국가 생민에 해가 되고 있으니, 이는 선왕의 옛 법전이 아닙니다. 이러한데도 고치지 않으면 장차 백성을 보호할 수가 없음은 물론이고 나라가 다스려지지 못할 것입니다. 이이가 경장(更張)하려고 한 것은 또한 장차 국가를 위하여 천명(天命)을 맞아 중흥의 업적을 세우려 한 것이니 어찌 그만둘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을 과연 분경(紛更)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진신들 사이에 다시 이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가려움과 아픔이 자기 몸에 절실하지 않아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이는 비난할 수 있어도 그 말은 옳은데, 어찌 사람 때문에 말조차 버려서야 되겠습니까.
아, 이이의 건백이 행해지지 못한 것은 또한 어찌할 수 없거니와, 조처하는 일에 이르러서도 반드시 온갖 방법으로 저해하여 무너뜨린 뒤에야 마음에 시원하게 여겼으니, 이것이 무슨 마음입니까. 곡식을 바치는 자에게는 허통(許通)시키자는 일에 이르러서는 당초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조처입니다. 계미년045) 변경의 흔단이 있었던 초기에 중국의 장사(將士)가 북방에 구름처럼 모였으나 군량이 다 떨어져서 운송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종의 2백 년 왕업을 일으킨 지역이 장차 오랑캐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감히 손을 소매 속에 넣고 편안히 앉아 있으면서 한 가지 계책도 조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 송나라 신하 주희(朱熹)는 지남강군사(知南康軍事)를 제수받았을 적에 부민(富民)에게 미곡을 빌어쓰고 영직(影職)046) 으로 보답하기로 언약함으로써 한 지방의 기근을 구제하였으며, 아조(我朝)에서는 이시애(李施愛)의 난리에 광묘(光廟)047) 가 일찍이 북도에 화살을 바치는 사람을 모집하면서 면천(免賤)시켜 양인(良人)이 되게 하였으니, 이러한 일은 평일 경상(經常)의 법이 아니지만 또한 실로 권변(權變)을 행하는 방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유가 이미 행하였고 조종조에서도 이미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당시에 격문이 서로 잇따르고 봉화가 쉬지 않아서 한 지방의 안위가 호흡 사이에 결판날 상황인데 어찌 장구(章句)를 따지는 썩은 선비가 큰 소리만 칠 뿐 완급(緩急)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그런 소위를 본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이가 이렇게 한 것은 다만 일시의 위급을 구제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었는데, 그 사이에 인재를 아끼는 뜻이 스며 있었음도 환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헌이 ‘이이가 이렇게 한 것은 인재를 아끼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이이의 본심을 아는 자의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이이가 시의(時議)와 합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행하기를 힘껏 청한 이유인 것입니다.
언자(言者)가 과연 구차하다는 것으로 논쟁하자 위에서 결의(決意)하여 행하였고, 이이가 죽은 뒤에 와서 언자가 또 전후 소생(所生)을 분간하여 허통(許通)시키자고 한 논의를 주장하여 논집해 마지않자 위에서 또한 깊이 살피지 아니하고 갑자기 따르셨습니다. 이 일이 미세하기는 하나 나라의 신망이 걸린 것이어서 지극히 중대한 것이므로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 이이도 전후의 소생을 분간해야 함을 모른 것이 아니었으나 뒤의 소생을 허통하고 전의 소생을 허통하지 아니하면 응모자가 극히 적을 뿐만 아니라, 장자는 천인이 되고 차자는 양인(良人)이 되어 한 집안 안에서 명분이 문란해져 또한 크게 사리에 어긋나게 생겼으므로 전후의 소생을 아울러 허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이가 이것을 함에 있어 어찌 의도한 바가 없이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대개 당초 사목(事目)에 전후의 소생을 분간한다는 말이 있지 않았으므로 곡식을 바치는 사람의 대다수가 연로하여 출산이 중단된 사람이었으니, 이것이 어찌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하며 나라를 위해 변경을 돕기를 복식(卜式)048) 처럼 하는 자들이었겠습니까. 그저 자손이 벼슬길에 통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공사(公事)를 처음 준허(准許)받았을 적에는 서얼의 무리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고려의 공사는 사흘을 넘어가지 않는다는 옛 속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가 가산을 다 기울여 후일의 계책을 도모하다가 만일 국가가 신의를 지키지 않고 곧바로 파하고서 그 댓가만 돌려주면 우리들의 일이 낭패이다.’ 하므로 권하는 자가 모두들 ‘그렇다 않다. 현재 이야(李爺)049) 가 조정에 있으니 어찌 이처럼 실신(失信)하는 일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서로 돌려가며 말을 전하였으므로 응모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곡식을 바치는 짐바리가 잇따랐고 군사(軍事)가 힘입어 구제되었습니다. 지금 그 일을 파하지도 않고 댓가도 돌려주지 않으면서 다만 전의 소생은 부거(赴擧)를 허락하지 못하게 하고 또 천첩 자식의 부거를 멋대로 정지시킨 경우가 많아 국가의 실신이 또 이 무리들의 처음 염려하던 이외에서 나오고 있으니, 백성을 속이는 데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그때 관금(關禁)이 엄하지 아니하여 곡식을 바치는 무리가 운송의 편리함을 이롭게 여겨 혹 포목(布木)을 가지고 가서 본도(本道)에서 곡식을 무역한 일이 있었는데, 이는 유사(有司)가 규검하지 못한 과실이요 서얼이 외람된 짓을 한 죄이므로 참으로 징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징치하고 신의는 잃지 않는 것이 옳은데, 위에서 일이 나인(內人) 족속에 관계된다 하여 특명으로 그 사람에게 댓가를 돌려주고 부거(赴擧)를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이는 성상의 지공무사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자못 실신(失信)에는 대소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모르신 것입니다.
아, 신의란 나라의 큰 보배입니다. 필부도 신의가 없으면 오히려 향당(鄕黨)에서 행동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인주로서 신의가 없으면 뒷날 급한 때에 어떻게 사방을 호령할 수 있겠습니까. 평일 무사할 때에는 큰 근심이 없다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일이 다급해지면 반드시 때늦은 후회가 있게 될 터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인이 ‘먹을 것을 버리고 군사를 버리되 신의는 버릴 수 없다.050) ’ 하였는데, 지금 한 가지 일을 하면서 세 가지를 잃었으니 불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곡식을 바친 무리가 이러한 억울함을 받았으니 어찌 상서(上書)하여 원통함을 송변(訟辨)하려 하지 않겠습니까만,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것은 또한 까닭이 있습니다. 즉위하신 이래로 너그러이 용납하여 간언을 받아들여서 언로(言路)가 크게 열렸으니 어찌 한 사람의 말도 채택할 만한 것이 없었겠습니까. 위에서 그 말을 선하게 여겨 유사에게 내리시지만 유사의 대다수가 관직을 태만히 하고 일을 싫어하는 사람이어서 일찍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일의 시비와 이해를 따져보지도 않고 일체 방계(防啓)하니, 아름다운 꾀와 특이한 계책이 시무(時務)에 절중(切中)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 폐지되고 시행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하들이 임금의 미덕을 받들어 순종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간언을 받아들이는 성상의 성대한 덕으로 하여금 간언을 쓰는 실효를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는 전하께서는 언로를 열어놓았으나 신하들이 그 문을 닫아버린 것이니, 지치(至治)가 흥기되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이것이 서얼들이 도움이 없음을 알고 감히 입을 열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아, 이이가 죽은 뒤부터 사기가 저상되어 사람마다 자신을 보전할 계획을 품고 있으니 인심과 세도가 날로 달라지고 때로 같지 아니하여 덕을 숭상하는 기풍이 점차 없어지고 이익을 취하는 습성이 날로 자랍니다. 따라서 아비가 자식을 경계하고 형이 아우를 권면하는 것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고 녹봉을 구하는 것으로 급무를 삼고 있으므로 스승을 높이고 벗을 가까이하여 충성과 효도를 강마(講磨)하는 자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신은 이와 같이 하여 마지않으면 그 유폐(流弊)가 장차 사유(四維)가 모두 없어지고 인욕이 마구 범람하여 동경(東京)의 당고(黨錮)051)와 남송(南宋)의 위학(僞學)052) 의 화를 날을 정해 놓고 기다릴 수 있음은 물론이고 나라도 따라서 위태롭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이 한 가지 일은 신의 사사로운 근심이며 지나친 염려이나 또한 조헌과 같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오늘날 언자로서 어떤 사람은 ‘오늘날 시배에 무식하고 부회하는 무리가 있기는 하나 또한 사림에 화를 일으키는 데에는 이르지 않는다.’ 하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역(周易)》 곤괘(坤卦)에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른다.’ 하였으니, 조짐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바야흐로 지금 조정에서는 화복(禍福)으로 사부(士夫)를 꾀고 주현(州縣)에서는 위형(威刑)으로 유사(儒士)를 으르니, 풍색(風色)의 불길함이 서리를 밟는 것에 비할 정도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부회하는 무리가 점차 화의 빌미를 만들어내어 강한 자는 공격하여 공을 자랑하고 약한 자는 영합하여 이익을 구하게 될 것이니, 뒷날 사림의 화가 이 무리들의 손에서 생기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이 또한 형상이 이미 드러난 것으로 어리석은 신이 억측으로 한 논의가 아닙니다.
아,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서인(庶人)이 의논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조정에 공론이 없은 뒤에야 초야에서 사론(士論)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론이 아래에서 격렬한 것이 어찌 국가의 복이겠습니까. 만일 시세에 빌붙어서 조론(朝論)에 화응(和應)하고 공정을 칭탁하면서 사정(私情)을 부려 당대의 현인을 몰래 모함하는 자가 스스로 포의(布衣)의 공론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여철(余喆)·황이옥(黃李沃)053) 의 소위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아, 수년 이래 조야의 사이에 인심이 날로 격렬해졌습니다. 계미년054) 에 관학(館學)의 유생이 소장을 올린 뒤로부터 사론이 발론되었다가 중지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을유년055) 가을에 삼사가 비로소 이이와 성혼을 논하여 이름을 당적(黨籍)에 편입시켰습니다. 이에 태학의 선비들이 소장을 올려 논변하려 하였는데, 그때 재임(齋任)으로 있던 자가 뒤에 소장을 올린 무리들에게 저지당한 바가 많아서 그 논의가 마침내 결행되지 못하였습니다. 유대정(兪大楨)과 유영겸(柳永謙) 등 7∼8인이 시론(時論)에 빌붙어서 진취(進取)의 매개로 삼고자 하기에 이르러서는, 종사(從祀)하자는 공론을 가탁하여 은밀히 정인을 욕하는 간계를 부려 성리학(性理學)을 강명(講明)한이이를 가리켜 도를 그르치고 진리를 어지럽히는 사람이라 하고 은거하여 지조를 지키는 성혼을 가리켜 이름을 팔고 성예를 구하는 선비라 하였으니, 이는 실로 기묘년의 간흉(奸兇)이 사림을 해치던 여론(餘論)056) 으로서 유대정 등의 말이 그와 은연 중 합치됩니다. 그리하여 머리를 감추고 논의를 정립하여 많은 선비를 농락하였는데 소장을 쓰던 날에 이르러서는 기미를 알고 가지 아니한 자가 태반인가 하면 어떤 이는 무심코 가서 참여하면서 소장의 사연을 보지 않은 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정 등이 그들을 다 열서(列書)하여 명수(名數)를 허세로 열기(列記)하여 인주로 하여금 그를 보고 많은 선비들 사이의 공공의 논의로 여기게 한 것입니다. 그때 속은 자가 한두 사람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계미년 황해도의 소두(疏頭)인 생원 유대춘(柳帶春) 등과 서울의 선비 약간인들이 모두 속은 속에 들어 있었으므로 또한 소장을 올려 스스로 변명하기 위하여 소장을 갖추어 올리려 할 즈음에 시론이 크게 험악하여지자 부형들이 통렬히 금하였으므로 또 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도성의 선비로서 간사한 모의를 미리 알고 당초 상소에 참여하지 않은 자 70∼80인이 서로 모여 모의하기를 ‘삼사의 무망(誣罔)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입을 다물고 있어도 가하거니와 모범 지역인 태학(太學)에서 이처럼 도를 어지럽히는 논의가 있으니, 변덕스럽고 간휼(奸譎)한 정상이 이미 드러났다. 그런데 정원에서는 이 무리들의 소위를 태학의 공공의 논의라 하기에 이르렀으니, 인신이 군부를 속임이 이에 이르러 극도에 이르렀고 사문(斯文)이 장차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들이 나아가서 물리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수천인의 소장을 갖추어 궐문에 크게 모여 장차 합문(閤門)을 두드려 호소하려 하였으나 해가 저물어서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다음날 또 모였더니, 어떤 사람은 부형의 위협으로 어떤 사람은 화복(禍福)으로 으르고 겁주는 바람에 위축되어 논의가 일치되지 못한 탓으로 파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이후로 많은 선비들이 서로들 ‘시배가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는 것이 하루하루 더 심해지니 말로 다투기가 어렵다. 또 시비는 한때에 혼란한 경우가 있지만 공론은 백대에 정해지는 것이니, 문을 닫고 강학하며 행동을 바르게 하고 말은 겸손히 하여 들은 바를 높이고 아는 바를 행할 뿐이다.’ 하였습니다. 지난날 조헌의 상소가 나오게 되어서는, 조헌 또한 오당(吾黨)의 선비이기는 하나 논의를 세움이 일방적이어서 스승의 뜻에 크게 어긋나 장차 고인이 된 스승의 지극히 공정한 마음으로 하여금 또한 후세에 민멸되게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70제자의 상(喪)이 있기도 전에 대의(大義)가 이미 어긋났다.057)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문(同門)의 선비가 서로 모여 ‘종전에 우리들이 소장을 올릴 적에 일찍이 근원까지 궁구하는 논의를 한 적이 없었으므로 고인이 된 스승을 존모(尊慕)할 줄 아는 자라도 고인이 된 스승의 풍지(風旨)를 알지 못하여 과격한 논의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한번 변론하여 위로는 우리 임금께 진달하고 아래로 동지에게 고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지난 겨울부터 서로 강론하고 서로 의견을 모아 스승이 조정에 벼슬할 적의 시말에 대한 실적을 대강 기술하였는데, 무릇 수개월 만에 소장이 비로소 탈고되었습니다. 그러나 식자는 ‘분분하게 소장을 올리는 것은 평이하게 살면서 천명을 기다리는 도리058) 가 아니다. 더구나 시배는 시비(是非)와 명의(名義)를 돌보지 않고 오직 공의(公議)와 힘껏 다툴 마음을 먹고 있을 뿐이니, 이 논의가 나가더라도 도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소요의 자료만 될 뿐이다. 저 조헌의 말이 스승의 뜻을 잃었지만 또한 우리들의 소견이 아니고 보면 스승에게 또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는가. 전일의 경계를 어기지 말고 물러가서 학문을 강론하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다.’ 하였는데, 동문 선비들 대다수가 이 말을 그럴싸하게 여기고 파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들은 그렇지 않다고 여기고 장차 홀로 진달하려 하였더니, 어떤 사람이 입이 닳도록 신을 극력 말리면서 ‘그대가 이 일을 하는 것이 스승의 원통함을 송변(訟辨)하려는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한 사람이 소장을 연달아 올리는 것은 번독스러울까 두렵다. 그리고 남의 사적인 서찰을 들추어내는 것도 크게 사리에 어긋나는 것은 물론 또 성대한 세상에서 할 일이 아니다. 스승의 뜻을 발명한다 하더라도 한 자를 굽혀 여덟 자를 펴는 것[柱尺直尋]059) 은 옛 사람도 부끄럽게 여긴 바이니 어찌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신 또한 이 말을 옳게 여겨 소장을 반도 쓰지 못한 채 중지하였습니다.
지금은 뜬 의논이 시끄럽게 들끓고 괴이한 논의가 난무하여 소장을 올리지 않아도 소요는 매한가지이니, 이 소장이 한 번 나가서 스승의 뜻이 만분의 일이라도 발명되는 바가 있으면 번독스럽게한 데 대한 주벌(誅罰)과 남의 서찰을 들추어 낸 죄책을 신들이 당한다 할지라도 진실로 차마 스승이 성세(聖世)에 무고당한 것을 범연히 보고만 있으면서 끝내 드러내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탈고한 소장에 스승이 이발·정철·김우옹의 무리와 왕복한 서찰을 첨입(添入)하여 삼가 목욕하고 백번 절하며 면류(冕旒) 아래에 진달합니다. 논술한 것은 실로 제배(儕輩) 사이의 공공(公共)의 논의요 진실로 신들 한두 사람의 소견은 아닙니다. 인용한 스승의 왕복 문자는 모두 이이의 본가에 있으니 어찌 감히 일호라도 장황히 떠벌여서 옛 사람이 ‘임금을 섬김에는 속이지 말라.’는 경계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이가 조정에 벼슬하면서 지녔던 시종의 공심(公心)을 헤아리고 조헌의 본말이 어긋난 잘못된 소견을 아시어, 조정을 위로하고 사림을 편안하게 해 주소서."
소장이 올라간 지 26일 만에 상이 비답을 내리기를,
"그대의 소장에 ‘들뜨고 조급하며 진출하기를 좋아하는 무리가 앞을 다투어 일어나 부회하였다.그때 심의겸의 문에 출입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서로 종유하며 종처럼 알랑거리던 무리가 영합하여 불의로 들어간 자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였고, 또 ‘전일 심의겸에 빌붙던 무리가 일시에 동인에게 납관(納款)하여 창을 거꾸로 돌려 심의겸을 공격한다…….’ 하였는데, 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임금을 섬김에는 숨김이 없는 것이 옛날의 도리이니 그대는 하나하나 죄다 들어서 대답해야 할 것이다."
하고, 조광현(趙光炫)·이귀(李貴)를 명초(命招)하여 물어서 아뢰게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조광현은 이미 시골로 내려갔으므로 이귀를 불러 물어 보았더니 ‘문자로는 자세히 다 말씀드릴 수 없으니 면대하기를 청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대가 창졸간에 서계(書啓)할 수 없다면 우선 물러가서 서계하라."
하였다. 이귀가 회계(回啓)하기를,
"고인이 된 스승이신 이이(李珥)는 충심으로 나라를 걱정하였는데, 한 번 시론(時論)을 거스르자 터무니없는 비방이 백방으로 나와 날로 새로와지고 달로 성해졌는데, 이것이 인심이 날로 격렬해지고 공론이 옆길로 터져나간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이해를 따지지 아니하고 이이의 본심을 드러내어 밝히는 것에 뜻을 두었던 것입니다. 만일 이이의 심사가 조금이나마 성명의 세상에 발명되는 바가 있다면 신은 만번 주륙을 당하더라도 마음에 달게 여기는 바입니다. 지금 성비(聖批)로 하문하시는 분부를 받드니 이야말로 신자가 숨기지 않고 다 말씀드릴 때입니다.
신이 이른바 ‘들뜨고 조급하며 진출하기를 좋아하는 자’란 백유양(白惟讓)·노직(盧稙)·송언신(宋言愼)입니다. 이러한 무리들을 일일이 진달하려 한다면 어찌 이 수삼 인의 무리에 그치겠습니까.그 가운데 두드러진 자가 이들입니다. 전일 심의겸과 체결하였다가 심의겸이 실세(失勢)한 뒤에 도로 심의겸을 공격한 자는 박근원(朴謹元)·송응개(宋應漑)·윤의중(尹毅中)입니다. 이들은 말할 거리조차 못됩니다.
또 심의겸과 서로 알고 지내는 정분이 이이에 비할 바가 아닌 자로는 이산해(李山海) 같은 자가 있습니다. 시배가 심의겸을 아는 것을 이이의 죄로 삼는다면 먼저 이 사람을 공격해야 옳습니다.시론에 거스르지 않은 까닭으로 이 사람은 공격하지 않고 이이만 죄를 주려 하다니 이것이 과연 임금을 섬김에 속이지 않는다는 도리입니까. 신이 이산해에게 유감이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이가 심의겸과 체결하여 일을 같이하지 아니한 것을 다른 사람은 혹 모를지라도 이산해는 반드시 알 것입니다. 그러나 이산해는 이이의 평생 고구(故舊)의 정분이 있는 사람으로서 이이가 무고당한 것을 멀거니 보고만 있으면서 주상의 앞에서 그의 본심을 한마디도 발명한 적이 없으니,이는 반드시 구원(九原)에 있는 이이도 유감이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신의 말이 그렇지 않다고 여기신다면 바라건대 이산해를 불러서 심의겸과 서로 알고 지낸 정분이 이이와 누가 더 깊었는가를 물어 보소서. 그러면 천일(天日)이 위에 계신데 산해가 어찌 감히 숨길 수 있겠습니까. 산해가 심의겸에게 준 시에,
서울에 봄이 오니 서찰을 다시 보겠고(洛下春來重見札)
산길 깜깜한 밤에 친숙히 서로 맞네(山蹊月黑慣相迎)
하였는데, 이것이 과연 심의겸을 모르는 자이겠습니까. 신이 이른바 ‘아침저녁으로 서로 종유했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이른바 ‘종처럼 알랑거렸다.’는 자란 정희적(鄭熙績)입니다. 신이 자신의 화를 두려워하여 정직하게 진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시배의 무망(誣罔)함을 책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재주는 엉성하고 글은 졸렬하여 우선 물러가서 자세히 아뢰려 하였으나 임금께 아뢰는 말을 다른 사람과 의논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임금의 말을 집에 묵히는 것은 더더욱 미안한 일이 되겠기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였는데, 회보가 없었다.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이귀가 올린 상소의 내용을 변명하여 아뢰기를,
"공론은 백대에 정해지는 것인데, 이귀가 매양 말로 쟁변합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바른 말이 사면에서 이르는데 그대들이 한 자의 종이로 막아 가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뒤에 경연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는 자가 있자, 상이 이르기를,
"이귀의 말은 곧 만세의 공론이다."
하니, 논하는 자가 조금 저상되었다.
당시 승지는 모두 한쪽의 준론(峻論)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이귀를 두렵게 하여 대답을 잘못하도록 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몽당붓을 주고 재촉해 문자를 지어 올리게 하였으므로 자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침 알지 못하는 어떤 이졸(吏卒)이 등 뒤에서 뾰족한 붓 한 자루를 몰래 던져 주었으므로 드디어 계사(啓辭)를 초하여 즉시 올렸다."
- 하략 -
서울에 봄이 오니 서찰을 다시 보겠고 洛下春來重見札
산길 깜깜한 밤에 친숙히 서로 맞네 山蹊月黑慣相迎
낙(洛)을 서울로 번역하였다!
낙양(洛阳) 여경문(丽景门)과 옛거리(老街)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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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뤄양洛阳) 백마사(白马寺) 제운탑(齐云塔)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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