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巨濟)·웅천(熊川)·고성(固城)·김해(金海)·창원(昌原)·진해(鎭海)·칠원(漆原)·남해(南海)·사천(泗川)·곤양(昆陽)·하동(河東) 11개 고을은 모두 한쪽이 바다에 접해 있으므로...
정조실록 31권, 정조 14년 8월 20일 무진 4번째기사
1790년 청 건륭(乾隆) 55년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408020_004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31권, 정조 14년 8월 20일 무진 4번째기사 1790년 청 건륭(乾隆) 55년 헌납 권회가 북관 지방의 4대 대왕의 후예에게 벼슬을 주기를 건의하다
sillok.history.go.kr
헌납 권회가 북관 지방의 4대 대왕의 후예에게 벼슬을 주기를 건의하다
헌납 권회(權恢)가 상소하기를,
"북관지방은 곧 조종의 왕업이 일어난 고장입니다. 4대 대왕의 후예가 세대가 멀어짐에 따라 벼슬이 오랫동안 끊어짐으로써 평민이 되는 것을 면치 못하게 되었는데, 벼슬에 등용하는 은전을 베풀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으니 이 어찌 결함이 아니겠습니까. 본도에는 8개의 능과 1개의 전(殿)이 있는데 이에 대한 침랑(寢郞)이 모두 합하여 14자리가 되며 그중에서 초사(初仕)의 자리가 7자리나 됩니다. 만약 이중에서 2, 3자리만 갈라내 4대 대왕의 후손을 뽑아 쓸 자리로 만들고 인망과 학식이 재랑(齋郞)에 합당한 자를 감사로 하여금 각 읍에서 골라 후보자로 추천하여 이조로 올려 보내 낙점을 받아 차임하게 한다면 참으로 먼 조상을 추모하고 종친의 의리를 돈독히 하는 성세의 거룩한 은전이 될 것입니다. 삼가 헤아려 조처하시기 바랍니다.
전라도의 옛 여수현(呂水縣)은 순천부(順天府)와 좌수영(左水營) 사이에 있는데, 순천과는 1백여 리나 떨어져 있고 수영과는 30리 안에 있습니다. 처음에 여수현이 없어지게 된 것은 수영을 설치함으로 인하여 순천에 합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닷가의 영세한 백성들이 이쪽저쪽으로 역무를 부담하게 되자 온갖 폐단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지난 을사년에 여수의 백성들이 비변사에 여러 번 호소문을 올렸고 또 대간의 상소로 인하여 수사로 하여금 여수까지 관할하게 하라는 하교를 특별히 받았는데, 이듬해 순천의 아전과 향임이 순천 백성을 여수 백성으로 가장시켜 여수 고을을 회복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뜻으로 상을 기망한 결과 즉시 여수를 없애고 순천에 소속시켰던 것입니다. 이에 여수 백성들은 너무도 억울함을 참지 못하여 순천 아전의 간교한 죄상을 대략 갖추어 다시 상문하려던 차에 순천부에서 그 기미를 알고 추격하여 잡아다 놓고 심한 곤장을 쳐서 5, 6명은 죽고 3명은 귀양가고 8명은 군에 보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수 백성들의 지극한 원한은 이미 말할 것도 없거니와 수영과 순천부 사이에서 생기는 민폐의 대략을 보면 군정을 양쪽에서 같이 보충시키는 것, 환자미를 여기저기서 받는 것, 신역의 대가를 여기저기서 징수하는 것, 부역을 이중으로 지는 것들입니다. 이 밖에도 허다한 고질적 폐단이 모두 전 수사였던 구세적(具世勣)과 이형원(李亨元)의 장계 속에 들어 있는데 그것이 비변사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지금 만약 여수현을 회복하기로 결정한다면 관청 건물과 창고가 고스란히 옛날 그대로 있기 때문에 국비와 민력이 따로 들어갈 것이 없습니다. 한결같이 옹진(瓮津)의 관례에 의하여 수영으로 하여금 여수를 겸해 관할하게 하여 백성을 안정시키고 관방을 굳건히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또 영남의 민폐로 말하면 거제(巨濟)·웅천(熊川)·고성(固城)·김해(金海)·창원(昌原)·진해(鎭海)·칠원(漆原)·남해(南海)·사천(泗川)·곤양(昆陽)·하동(河東) 11개 고을은 모두 한쪽이 바다에 접해 있으므로 백성들의 생활이 다만 고기잡이에 있을 뿐이었는데, 균역청을 설치한 뒤로는 각 해당 고을이 어장의 좋고 나쁜 것을 막론하고 숫자만을 따져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세를 받아 위에 바치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병신년부터 통영(統營)에서 관청 비용이 부족하다 하여 11개 고을의 어장세를 3년을 기한하고 균역청에서 빌려냈습니다. 그러나 균역청에 바치는 것은 여전히 그대로 있어 줄지 않고 통영에 바치는 것은 없던 것이 덧붙여져서 더욱 가혹하였습니다. 한 지방에서 두 곳에 세를 바치는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무술년에 이르러서는 통영에서 또 백성들의 고질적인 폐단을 창출한 것이 4가지가 있으니, 어장 가운데서 좋은 곳은 각 관청에 분속시켜 영문(營門)에서 팔아버리게 하는 것이 첫째이고, 고기잡이를 할 때가 되면 영문의 장교와 군사들이 감독을 한다고 하고 또 잡다한 어세를 배마다 5냥씩 바치라고 성화처럼 독촉하는 것이 둘째이고, 앞서 신축년에 조정에서 거제(巨濟)에 사는 탁가(卓哥)의 아내가 올린 호소문에 의하여 멸어(蔑魚)의 세를 배마다 5냥씩 바치는 규정을 영원히 없앴는데, 근래에 영문에서 멸어라는 명칭을 소어(蘇魚)라고 고쳐 배 1척의 세를 7, 8냥씩 더 징수하면서 이것을 기본세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셋째이고, 이른바 관청에서 판 것 외에 수입을 잡을 가치가 없는 곳은 모두 쓸모가 없는 지대인데도 세를 받아들일 때에는 좋은 어장과 조금도 차이를 두지 않는 것이 넷째입니다. 한 곳에서 두 차례의 세를 무는 것도 지극히 원통한 일인데, 지금 이 어장의 세는 균역청에 하나가 있고 통영에 셋이 있어 1년 동안에 모두 네 가지나 됩니다. 그리하여 떠나는 백성이 속출하여도 호소할 곳이 없습니다.
각 포구의 백성들이 참다못해 감영과 비변사에 글을 올리면 비록 공문을 띄워 조사해 보라는 명령이 내려가기는 하나, 통영에서는 어장의 이득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실태 조사는 고사하고 도리어 글을 올린 소두를 잡아다가 반년씩이나 가두니 옥에서 살아나오는 것만도 다행이고 가산을 탕진하는 것은 오히려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감히 위에 알리지 못하고 위에서는 굽어 살피지 못하니, 이 지극한 원한을 언제 풀 수 있으며 이 고질적 폐단을 언제 없앨 수 있겠습니까. 만약 통영에 조사를 실시한다면 결국 백성들에게 낭패만 안겨주게 될 것입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전하의 결심으로 단안을 내려 각 해당 고을 백성들에게 세금을 이전 규정대로 계산하여 배정한다면 11개 고을 바닷가의 백성들이 만백성을 동일하게 보살펴주는 혜택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 어찌 만대를 내려가면서 칭송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묘당에 명하여 품의 조처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1책 31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166면
【분류】수산업(水産業) / 구휼(救恤) /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왕실(王室)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軍事) / 재정(財政)
"거제(巨濟)·웅천(熊川)·고성(固城)·김해(金海)·창원(昌原)·진해(鎭海)·칠원(漆原)·남해(南海)·사천(泗川)·곤양(昆陽)·하동(河東) 11개 고을은 모두 한쪽이 바다에 접해 있으므로 백성들의 생활이 다만 고기잡이에 있을 뿐이었는데"
거제(巨濟)
웅천(熊川)
고성(固城)
김해(金海)
창원(昌原)
진해(鎭海)
칠원(漆原)
남해(南海)
사천(泗川)
곤양(昆陽)
하동(河東)
정조실록에는 "거제(巨濟)·웅천(熊川)·고성(固城)·김해(金海)·창원(昌原)·진해(鎭海)·칠원(漆原)·남해(南海)·사천(泗川)·곤양(昆陽)·하동(河東) 11개 고을은 모두 한쪽이 바다에 접해 있다"라고 했지만!
현재 거제와 남해는 4면이 바다인 섬이고!
김해와 칠원은 한면도 바다와 접하지 않은 내륙이다!
"전라도의 옛 여수현(呂水縣)은 순천부(順天府)와 좌수영(左水營) 사이에 있는데, 순천과는 1백여 리나 떨어져 있고"
“좌수영[ 左水營 ]
요약 조선시대 전라도·경상도 수군의 주진(主鎭).
《경국대전》진관체제에 따라 수군은 각 도마다 주진(主鎭)·거진(巨鎭)·제진(諸鎭)으로 편제되고, 주진에는 수군절도사가 배속되었다. 수군절도사는 정3품 외관직의 무관으로, 임기는 720일이었다. 수군 병사는 해상근무가 원칙이었으나 병선관리와 고달픈 훈련 때문에 성종 때부터 진에 성보(城堡)가 설치되었다. 세종 때는 양인층(良人層)의 주된 의무병종이었으나, 성종 때는 천역으로 화하였고 조선 말기에는 수군이 칠반천역(七般賤役)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왜구와의 접촉이 심하였던 전라도와 경상도에는 수군절도사가 상주하는 주진을 각각 두 곳에 설치하였는데, 서울에서 보아 각 도의 서편, 즉 우편을 담당하는 주진을 우수영, 동편 즉 좌편을 담당하는 주진을 좌수영이라 하였다. 전라도에 두었던 좌수영은 1479년(성종 10) 이후 순천의 오동포(梧棟浦 : 지금의 여수)에, 경상도좌수영은 효종 이후 동래에 두었다. 1907년 군대해산령에 의하여 각 도의 수영은 폐영되었으나, 지금까지도 수영이 있었던 곳은 명칭과 함께 흔적이 남아 있다. 수영은 주위에 석성(石城)을 구축하여 해양방위에 임하는 한편, 인원 차출, 병선 건조, 무기 제조, 수군 훈련 등의 의무를 부여받고 있었다. 전라좌수영에 소속된 13개 읍진의 병선수는 전선 14, 구선 1, 병선 14, 방선 1, 사후선 30, 왜선 1이고, 주진의 병선수는 전선 4, 병선 4, 사후선 11이었다. 경상좌수영에 소속된 9개 읍진의 병선수는 전선 9, 구선 2, 병선 10, 사후선 22이고, 주진의 병선수는 전선 3, 구선 1, 병선 5, 사후선 11, 탐선 1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좌수영 [左水營] (두산백과)
“우수영[ 右水營 ]
요약 조선시대 전라도와 경상도에 두었던 수군의 주진(主鎭) 가운데 오른편을 관할하던 수영.
전라 우수영 성지
조선 조정에서는 왜구가 자주 출몰하는 전라도와 경상도에 수군절도사가 주재하는 주진을 각각 두 곳씩 설치하였다. 이들은 서울에서 볼 때 각 도의 서쪽편, 즉 오른편을 담당하는 주진을 우수영, 동쪽편, 즉 왼편을 담당하는 주진을 좌수영이라 하였다. 수영마다 한학의 역학(譯學) 1명과 왜학의 역학 1명을 두었다. 전라도우수영은 무안에 설치하였다가 1465년(세조 11) 이후 해남으로 옮겼고 경상도우수영은 거제에 설치하였다가 1604년(선조 37) 고성(지금의 통영)으로 옮겼다. 1907년 군대해산으로 각도의 수영은 모두 해체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수영 [右水營] (두산백과)
오동포(梧棟浦)
“오동도 Odongdo / 梧桐島
전라남도 여수시 한려동에 위치한 섬.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시작점이다. 본래 여수항 동쪽에 있는 섬이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35년 축조한 길이 768m의 방파제로 육지와 이어져 있다. 면적은 약 0.12㎢. 행정 주소는 전라남도 여수시 수정동 산1-11. 섬의 이름은 오동나무에서 유래했는데, 섬의 모양이 오동나무 잎을 닮았고, 섬에 오동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고려 말 신돈이 오동나무 숲은 왕조에 불길하다고 주장하여 오동나무들을 모두 베어버렸다는 전설이 있다.여수시가 관광 도시로 유명해지기 전부터 유명한 관광지로 꼽히고 있었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동백꽃 자생지이며 해식애가 발달해 여러 기암절벽들이 존재하고 있다.섬 정상에는 1952년에 세운 오동도 등대가 있다. 그리고 근방에 전망대를 만들어 일반인에게 개방했는데, 올라가보면 여수항과 남해바다가 꽤 잘 보인다.
“(나무위키-오동도)
여수현(呂水縣)
여수시[ Yeosu-si , 麗水市 ]
사진출처: 두산백과-여수시
전라도에 두었던 좌수영은 1479년(성종 10) 이후 순천의 오동포(梧棟浦 : 지금의 여수)에 있었고!
좌수영과 순천부 사이에 여수현이 있었는데, 1백리 거리였다!
오동포(梧棟浦)가 오동도(梧桐島)로!
여수현(呂水縣)이 여수시(麗水市)로 음이 같은 다른 한자로 바뀌어 있다!
'조선왕조실록 기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첨성대는 높이가 19척 5촌, 위의 둘레가 21척 6촌, 아래의 둘레가 35척 7촌이다... (0) | 2022.10.26 |
---|---|
임금은 마음을 바르게 함으로써 조정을 바르게 하고... (2) | 2022.10.26 |
거문도는 동해의 요충지로서 위해의 지부, 대마도, 부산과 다 거리가 매우 가깝습니다 (0) | 2022.10.26 |
거질다포居叱多浦는 대마도對馬島와 민가의 연화煙火를 서로 바라볼 수 있을 만치 가깝고... (0) | 2022.10.25 |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먹는 것은 백성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니... (0) | 2022.1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