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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기사

문약文弱에 이르지 않고 무력을 남용하는 데에 이르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송나라의 정치는 오로지 문교(文敎)만 숭상하였으므로 역대에서 가장 무위(武威)가 떨치지 못하였다. 뿌리가 허약해져 오랑캐들이 침략한 바람에 고상한 이야기와 태연한 걸음걸이가 필경에는 넘어지고 위태로운 형세를 부축하고 지키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고 말았는데, 이는 후세에서 마땅히 거울로 삼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대체로 문무를 아울러 사용하는 것은 예로부터 어려웠다. 상호 부족한 것을 보완하는 것은 또한 상리(常理)인데, 어떻게 하면 관대하고 질박한 것을 주로 삼고, 강력하고 굳센 것으로 구제하여 문약(文弱)에 이르지 않고 무력을 남용하는 데에 이르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예악(禮樂)을 숭상하면서도 활쏘기와 말타기를 폐지하지 않고 농사의 여가에 수렵(狩獵)을 잊지 않으며, 군사 훈련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시서예악(詩書禮樂)의 글을 익히고 차분하고 여유 있게 예절을 갖추면서도 군대의 앉고 서며 나아가고 물러가는 절도에 익숙하게 하는 것은 옛날 성군의 헤아릴 수 없는 신화(神化)가 두 가지 면에 있는 것이다. 내가 비록 덕이 없지만 이것을 소원하고 있는데,어떤 방법으로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정조실록 15권, 정조 7년 6월 26일 병술 4번째기사

1783년 청 건륭(乾隆) 48년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706026_004

 

조선왕조실록

○是夜, 上召承旨、史官謂曰: "爲民祈雨, 一念憧憧, 瞻望雲霓, 不遑暇寐。 方坐待行事之畢, 以寓躬禱之忱, 而今雲烟漸散, 星漢昭回, 一霈尙無意耶。 詩人所謂, 憂心如淡, 正指今日予懷也。" 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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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제 지내는 동안 승지와 사관을 불러 정사를 논하다

 

이날 밤에 임금이 승지와 사관을 불러 이르기를,

 

"백성을 위해 비를 비는 한결같은 생각에 마음이 불안정하여 구름을 바라보느라 잠을 잘 겨를이 없다. 그래서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몸소 비는 정성을 나타내려고 하는데, 지금 구름이 점점 흩어지고 은하수가 드러나고 있으니, 한번 시원스럽게 비가 내리지 않으려는가 보구나. 시인(詩人)이 이른바 ‘걱정스러워 속이 탄다.’는 말은 바로 오늘날 나의 마음을 두고 한 말이다.“

 

하니, 승지 조흥진(趙興鎭)이 말하기를,

 

"검은 구름 한 가닥이 북방을 가렸는데, 이는 가장 믿을 수 있는 비올 징조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경방역전(京房易傳)》에 ‘청색 백색 적새 흑색의 구름이 동서 남북에 있는 것을 사색운(四塞雲)이라고 하는데, 이 현상이 나타나면 비가 온다.’고 하였고, 기타 황새가 언덕에서 울거나 달이 필성(畢星)의 성좌로 들어가도 비가 온다고 각각 경서(經書)에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 꼭 들어맞는다고 할 수 없다.“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과 같이 송(宋)나라의 인물에 대해 논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구준(寇準) 같은 사람은 한 시대의 유명한 정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전연(澶淵)의 전쟁117) 때 여러 사람의 의논을 극력 저지하고 황제에게 친히 정벌할 것을 권하여 결국 큰 공을 이룩하였다.그러나 또한 의논할 점이 있는데, 그 당시에 명(明)나라의 토목보(土木保)와 같은 사변118) 이 있다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니, 사관 서형수(徐瀅修)가 말하기를,

 

"구준과 같은 치밀한 식견으로 황제가 경솔하게 친히 정벌에 나설 수 없다는 것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그가 우뚝 서서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필시 뚜렷한 견해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참으로 독실한 자신감이 없었다면 필시 이처럼 극력 간쟁(諫爭)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송나라의 정치는 오로지 문교(文敎)만 숭상하였으므로 역대에서 가장 무위(武威)가 떨치지 못하였다뿌리가 허약해져 오랑캐들이 침략한 바람에 고상한 이야기와 태연한 걸음걸이가 필경에는 넘어지고 위태로운 형세를 부축하고 지키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고 말았는데이는 후세에서 마땅히 거울로 삼아 경계해야 할 것이다대체로 문무를 아울러 사용하는 것은 예로부터 어려웠다상호 부족한 것을 보완하는 것은 또한 상리(常理)인데어떻게 하면 관대하고 질박한 것을 주로 삼고강력하고 굳센 것으로 구제하여 문약(文弱)에 이르지 않고 무력을 남용하는 데에 이르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대체로 예악(禮樂)을 숭상하면서도 활쏘기와 말타기를 폐지하지 않고 농사의 여가에 수렵(狩獵)을 잊지 않으며군사 훈련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시서예악(詩書禮樂)의 글을 익히고 차분하고 여유 있게 예절을 갖추면서도 군대의 앉고 서며 나아가고 물러가는 절도에 익숙하게 하는 것은 옛날 성군의 헤아릴 수 없는 신화(神化)가 두 가지 면에 있는 것이다내가 비록 덕이 없지만 이것을 소원하고 있는데어떤 방법으로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신하들이 모두 일어나 대답하기를,

 

"우리 전하께서 이러한 뜻을 가지고 계시는데, 뜻을 게을리 가지지 않는다면 일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재능이 천박하여 대양(對揚)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어 염(濂)·()119) 의 연원(淵源)에 대해 논하다가 5경에 이르러 어두컴컴한 사이로 횃불이 타오른 것을 보고 제사가 끝났다는 것을 알고서 비로소 여러 신하들을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67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374면

【분류】왕실(王室) / 역사(歷史)

 

註 117]전연(澶淵)의 전쟁 : 송(宋)나라 진종(眞宗) 경덕(景德) 원년에 요(遼)나라 군대가 송나라 지경으로 깊숙이 들어오자 조정이 진동하였는데, 여러 사람들은 피난을 가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재상 구 준이 여러 의논을 물리치고 진종이 직접 정벌에 나서도록 권하여 11월에 진종이 전연에 이르렀고, 구준이 모든 일을 전적으로 처리하자, 요나라가 전쟁에서 불리함을 알고 사신을 보내어 맹약을 맺자고 요청하였던 일.

[註 118]토목보(土木保)와 같은 사변 : 명나라 영종(英宗)이 북방의 달단족(韃靼族)을 몸소 정벌하다가 패전하여 토목보(土木保)에서 적군에게 사로잡힌 일을 말함.

[註 119]염(濂)·락(洛) : 염락관민(濂洛關閩)의 준말이다. 송대(宋代) 성리학의 주요 학파로,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정이(程頤),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희(朱熹)를 가리킴.

 

 

 

 

 

                                                           이순신 장군 동상 닦는 초교생